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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립문자와 시- 생략과 함축

(이대흠시인 문학속불교)불립문자와 시- 생략과 함축
시어는 따로 있지 않다. 세상에 떠도는 모든 말이 시어일 가능성이 있다. 시인은 직관의 힘으로 우주의 원리나 삶의 지혜 같은 것을 언어를 빌려 쓴다. 그러나 시인은 늘 자신이 쓰고자하는 것을 제대로 쓰지는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게 목적이 아니므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이 합당하다. 시인은 분명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이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표현 방법을 찾는다. 그냥 일상어로 해서는 자신이 뜻하는 의미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역설이나 반어, 은유나 공감각적 표현을 쓴다. 그것은 다 자신이 생각한 바를 명증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일상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지만 심오한 인간의 정서를 드러내기에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시인들은 따뜻한 슬픔이니, 외로운 황홀함이라느니, 찬란한 슬픔이나,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즉 시는 언어로 쓰이지만, 시의 묘미는 언어를 줄이는 데 있다. 언어를 줄이고 줄여, 더 줄일 수 없는 게 시이다. 그래서 백지시도 가능한 것이다. ‘백지시’는 염화미소를 닮아 있다. 단 한 편의 시를 쓰지 않고, 시를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단 한 줄의 글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가장 시인다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의 시는 문자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증명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석가모니는 어떤 경전도 저술하지 않았다. 석가모니의 법은 불립문자로 전해졌다. 어쩌면 가장 좋은 시도 불립문자일 것이다. 범왕이 영산에 와 설법해 주길 청하자, 부처는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가섭만이 염화미소로 전해졌다.
염화미소는 중국 송나라 이후 선종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종지(宗旨)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자주 거론 되었다. 이른바 선종에서 심인(心印)이라는 것은 몇 마디 선문답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불립문자로 건네지기도 한다. 불립문자는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진리가 전해질 수 없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그러므로 법을 전할 때 굳이 문자가 필요하다면, 가장 간결하게 하는 것이 법을 전하는 방식이다. 항상 가짜는 시끄럽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생략과 함축이다. 이는 현대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여름 한낮 // 비름잎에 // 꽂힌 땡볕이 // 이웃 마을 // 돌담 위 // 연시(軟?)로 익다 // 한쪽 볼 // 서리에 묻고 // 깊은 잠 자다 // 눈 오는 어느 날 // 깨어나 // 제상(祭床) 아래 // 심지 머금은 // 종발로 빛나다.
(박용래 ‘연시(軟?)’ 전문)
표면적으로는 땡볕이 연시가 되고, 연시가 종발이 된다. 그러나 비유의 바탕인 공통점을 중심으로 독해해 나가다보면, 땡볕이 연시에 스며들어 연시를 더 붉게 하였을 것이다. 이런 자연스런 흘러듦은 우주의 순환원리다. 그런데 연시가 종발이 되는 것은 단순하지가 않다. 연시와 종발의 공통점은 없다. 그러나 종발에 담긴 연시의 모양을 연상해 보았을 때, 그것은 호롱불과 닮았다. 그러므로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라는 구절은 감꼭지를 심지로 보았을 때, 가능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놓인 위치는 제상(祭床) 위가 아니라, 제상 아랫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연시는 어느새 호롱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상 위에 연시가 제물로 놓여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것은 밤을 밝히는 호롱불의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은 시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또한 연과 연 사이의 여백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들어 있는가. 이러한 생략과 함축을 즐겨 사용한 시인 중 한 명이, 운율의 마술사로 일컬어지는 김영랑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미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전문)
빈번한 조사의 생략은 물론이고, 문장의 주성분마저 지워버렸다. 그것들이 지워진 곳에서 언어는 음악이 되어 굴러다닌다. 시의 언어는 생략과 함축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고 예술성을 획득한다면, 선사들의 시에서 보이는 생략과 함축은 전달하기 어려운 깨달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청허당 서산대사의 시 한편을 보자.
꽃 지는 향기 가득한 마을
숲 사이에서 들리는 새 소리
절은 어디에 있는가
봄 산은 반이 구름인데
시의 의미는 깊어서 몇 마디 단어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관의 힘이 필요할 뿐이다. 직관으로 알아낸 의미를 다시 직관의 힘을 빌려 독해해야 하는 것이다. 꽃향기 가득한 마을인데, 꽃의 모양은 보이지 않는다. 새소리는 들리는데, 새는 보이지 않는다. 산 가득 구름이 들어차 있어서 절은 어디에 있을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구와 구 사이의 여백이 많아 단순하게 독해하는 것을 버겁게 만든다. 반면 현대시는 여백이 많더라도 ‘구체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뜰이 고요하다 / 꽃이 피는 동안은 //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 맨살의 하늘이 / 해종일 / 꽃 속으로 들어간다 / 꽃의 입시울이 젖는다 // 하늘이 / 향기나는 알을 / 꽃 속에 슬어놓는다 //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이면 좋겠다
(문태준‘꽃이 핀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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