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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 ‘장미의 이름’으로 ‘불교의 이름’으로…부패와 폭력 타락을

 

2009년 기축년 새해를 맞았다. 경전에서 소는 해탈의 과정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불자들에게는 그 어느해보다 살갑게 다가오는 해이기도 하다.
10년전 경제적 어려움을 능히 이겨낸 경험이 있었기에 우리 불자들은 작금의 위기를 성공과 기회로 가기 위한 잠깐의 외출쯤으로 여기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자 하는 바람을 신년의 각오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최근 한달여 사이에 불자들을 당혹케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어서 가뜩이나 다잡은 불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조계종은 물론이요 기타 중소종단의 스님들이 이권, 혹은 종권을 둘러싸고 폭력 및 도박, 사기 등에 줄줄이 연루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교구본사 및 말사의 중진스님들이 폭력사건에 휘말림으로써 종단의 대외적 이미지는 연초부터 급락하고 말았다. 사실 이러한 스님들의 폭력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의 해를 맞아 다시 한번 되새기려 하는 이유는 이제 불교가 더 이상 하나의 종교로 국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의 종교편향사건에 대응하며 보여준 한국불교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4대강 개발문제를 들고 나왔을때도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환경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선한 반향을 불러왔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들은 다른 종교에서 보지 못한 포용과 강직함에 불교를 다시보기 시작했다. 불교가 사회지도그룹으로 나서는 순간이다.
그런데 작금에 빚어지고 있는 스님들의 파행은 이러한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움베르코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탈리아어: Il nome della rosa)은 작가가 주장하고자 했던 메시아적 종교성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는 종교의 타락에 터 큰 문제의식을 갖게 한 수작이다. 
1327년 11월의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은 당시 교황과 황제 사이의 세속권을 둘러싼 다툼,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청빈 논쟁, 제국과 교황에 양다리를 걸치려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입장, 수도원과 도시 사이에 흐르는 갈등 등을 다루고 있다.
종교의 타락과 메시아적 종교성 사이의 문제를 다룬 이 소설에서 우리들은 종교가 타락에 빠질 경우 어느 정도까지 가게 되는지 대략 예측해 볼 수 있다. 
만약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불교계 스님들의 이러한 타락과 폭력이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다르지 않다면 한국불교는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르려면, 최소한 진일보한 종교라면 작금의 상황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신년 초부터 ‘불교의 이름’으로 윤리와 도덕을 외쳐본다. 

 

경고: 아래에는 이 작품의 줄거리나 자세한 결말이 나와 있습니다.

 

[편집] 줄거리


프란체스코 수도사, 바스커빌 출신의 윌리엄과 그를 모시는 수련사, 멜크 수도원의 아드소는 황제측과 교황측 사이의 회담 준비를 위해 회담이 열릴 수도원에 도착한다. 그 수도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원장은 윌리엄에게 이 사건을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에도 몇몇의 수도사들이 사망한다. 윌리엄은 이 사건의 중심에 미궁의 장서관이 있다고 보고 그곳을 조사하는 한편, 수도사들을 탐문한다.
결국 윌리엄은 여러 자료를 통한 추론으로 장서관의 밀실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낸다. 장서관의 밀실에는 윌리엄의 예상대로 호르헤 노수도사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윌리엄과 호르헤는 마지막 논쟁을 펼친다. 장서관의 비밀을 지키려는 호르헤에 의해 장서관은 불에 휩싸인다.
본관 3층의 장서관에서 본관 전체로, 본관에서 다른 건물로 계속 불이 옮겨 붙고, 그 불은 사흘 동안 타오른다. 기독교 최대의 장서관을 자랑하던 그 수도원은 결국 폐허가 된다. 이후 아드소는 멜크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윌리엄은 흑사병 유행기에 사망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윌리엄 신부와 어린 수도승 아드소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방문하게 되는데,
그 때 일어나는 살인사건들을 지켜보게 되면서 당시 수도원의 폐쇄적이고 타락된 모습들을 보게 된다.
수도원이라면 사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원래의 청빈하고 순수한 신에 대한 믿음과 숭배를 지켜나가려는 단체임에도 베네딕트 수도원을 보게 되면서 그 실상을 알게 되었다.
한 수도사는 이름 모를 가난한 처녀에게 식량을 주는 대신 성관계를 요구하며, 나중에 살인을 당하는 한 수도사는 미소년을 좋아하였다.
그 외에도 백성들로부터 식량을 받고, 돈을 거둬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이유가 드러난다.
하지만, 베네딕트 수도원의 최고 책임자인 호르헤 수도사와 이단교 심판관인 베르나르기를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장미의 이름'이 상징하는 영원한 진리,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라는 게 얼마나 덧없는 것이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장미의 이름' - 이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다
과거 중세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서양 세계는 성경을 빼놓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이다.
여전히 교황은 계속 선출되고 있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서양은 이성을 대표하는 과학도 발전시켰다.
상반되는 이 두 가지가 서양에서 발전해왔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 두가지간에 균형을 이루려 노력했다는 것이 아닐까.
어느 하나가 영원한 진리로 굳어지는 것을 막기위한 노력말이다.

이만섭<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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