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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받드는 것

(이대흠시인 문학속불교)사랑은 받드는 것
현대시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법인 역설은, 모순된 어법이다. 하지만 그 모순 어법에는 분명한 어법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진리나 의미가 들어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예로 들어보자.
님의 부재가 곧 님의 존재가 되는 역설에는 불교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 그러므로 만남과 헤어짐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그것을 승려이기도 하였던 빼어난 시인 만해가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로 바꾸어 쓴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불교에서 진리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흔하게 나타난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의 핵심 사상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의 핵심 사상도 역설이다.
색은 형태가 있는 대상이고, 공은 형태가 없는 것이다. 고로 있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 눈에 보인다고해서 있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인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 의해 인지된 것들일 뿐이다. 인간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이 다섯 가지 밖에 없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 다섯 가지 감각에 의지하여 대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간에게 없는 감각으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없을까.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박쥐는 초음파를 이용하여 대상을 식별한다.
잠자리의 눈도 인간의 눈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대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현미경을 통해 보았을 때 우리의 몸과 몸 밖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더구나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핵과 중성자로, 나아가 쿼크 단위에 이르면, 구분이란 것은 모호해진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였다고 하지만, 현대과학의 수준은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과학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부처의 법 안에서 헤매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역설은 현대시에서도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정지용이 어린 아들을 잃고 썼다는 시 ‘유리창’에서도 역설법은 돋보인다. 유리창 밖에 죽은 아들이 와 있는 것만 같아서 ‘유리창’의 시적 화자는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본다.
그 때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물론 여기에서 ‘물 먹은 별’이란 화자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는 의미로 풀어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유독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본 화자는, 어쩌면 죽은 아들이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이내 눈에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눈물어린 눈으로 별을 보고나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이를 잃은 아비의 심사를 ‘외로운 황홀’이라는 모순어법이 아니고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이가 없이 혼자 창 안에 있어서 외롭지만, 아이의 모습인 것만 같은 별을 바라보는 황홀 또한 있는 것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유독 운율에 천착하였고, 언어의 조탁에 심혈을 기울였던 영랑 김윤식. 그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도 역설법은 심오한 주제를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모란이 없으면, 봄이 없는 화자는 모란이 피기까지 하염없이 자신의 봄을 기다린다. 모란이 삶의 보람이고 기쁨인 화자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리자 서운하게 울다가, 이내 다시 기다림의 자세를 회복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별은 봄날 날리는 배꽃 떼나 벚꽃 떼처럼, 아름답고, 환하고, 향기로울 수도 있다. 사실 그런 사랑이고 이별이어야 꽃다울 것이다.
이대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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