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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誤)에서 맞음(正)으로 회통하는 불교생태사상-7

III. 결론- 모든 존재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여러 기관과 단체 그리고 종교단체와 학술단체 등에서 인류가 겪어왔고 겪고 있으며 겪어야 할 생태의 위기상황 바르게 파악하고,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며 대안을 제시하여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노력들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단체와 종교 및 학회에서 진행해 온 노력은 매우 쓸모 있게 적용될 것이라 생각한다.
  생태계의 위기와 관련하여 현상에 관한 정확한 파악과 현상이 발생한 원인에 관한 진단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한 모델에 관한 설정과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바람직한 방법론의 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생태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론적 연구는 부분적이면서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생태(生態)라는 말은 ‘태어난 모습’, ‘살아있는 상태’, ‘생기 있는 모습’, ‘존재들의 모습’의 뜻이다. 그러면 생태 또는 생태계가 위기를 맞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태어난 모습’, ‘살아있는 상태’, ‘생기 있는 모습’, ‘존재들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생기 있는 상태, 평화롭고 행복 한 상태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떤 영향을 받아서 태어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을 위험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인식의 주체인 마음과 대상인 객관적 존재 그 어느 것이 부재하면 사실을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철저히 중도에 입각해서 사물을 관조한다. 따라서 현대 자연과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함에 따라서 두 경향은 한 곳에서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 본질적으로 주·객 2분법의 대립사유구조를 배제하는 중도주의인 불교와의 만남의 가능성이 짙게 되었다.
  모든 것들의 근원이 하나라는 일원론(一元論)은 이미 부정되고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며, 둘 이상은 단어와 논리 자체에 모순이 있는 개념이다.

  이원론이나 다원론 또는 둘이 아니라는 이론보다 단순하면서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은 혹시 없을까?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는 사상, 근원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찾아내지 않는 사상이 있지 않을까? 어떤 근원을 가정하면 근본주의에 빠져서 다른 사상들과 다투기 쉽고 근원이 없다고 하는 무원(無元)이라야 평화로운 생태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서 무원론(無元論)에 입각한 무원주의(無元主義)를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장 작은 하나의 점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어느 존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간다고 해도 끝내 하나의 점이나 하나의 근본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현재의 상태와 수준에서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생각될 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믿음의 법칙, 마음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틀림에서 다름으로, 다름에서 같음으로, 같음에서 맞음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결국 틀림에서 맞음으로 회통하는 것이 생태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사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틀림에서 맞음으로의 회통은 곧 생태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지속이 가능한 발전을 이끌 수 있다. 개발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이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여서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리라는 기대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가치가 되었다. 아직도 과거의 가치개념에 사로잡혀 무조건적인 개발이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생각에서 빚어낸 잘못된 정책의 피해가 정부와 자치단체 그리고 기업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생태의 보존이 가지는 경제가치가 개발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경제가치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붓다는 생, 로, 병, 사의 근본 고통을 가진 인생 안에서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네 가지 고통을 주목했다. 그것은 첫째,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 둘째, 미워하는 이와의 만남, 셋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 넷째 이 모든 것을 합해서 설명한다면 나의 구성원인 5온(五蘊) 즉 물질(色), 감각(受), 연상(想), 의지(行), 인식(識)의 다섯 가지가 왕성해짐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탐욕(貪慾)을 없애서 평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상을 통해서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적 정보에 의해 흔히 우리가 실재(實在)라고 알았던 것이 사실은 관념이며, 과거의 연상에 따른 기억이며 그것을 말이나 글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관념이며 기억이며 언설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 본 현상 또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생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식(識, ahara)이 모이면 신(身, kaya)이 모이고, 식이 멸하면 신이 사라진다. 촉(觸)이 모이면 수(受)가 모이고, 촉이 멸하면 수가 사라진다. 명색(名色)이 모이면 마음(心)이 모이고, 명색이 없어지면 마음이 사라진다. 기억이 모이면 현상(法, dhamma)이 모이고, 기억이 없어지면 현상이 사라진다.”

  현상(法,dhamma)은 영어의 phenomena에 해당하며, 그것을 한자어로는 法으로 옮기면서 약간 의미가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법은 일반적으로 법칙(law) 또는 진리(truth)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dhamma는 현상 또는 사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거기에 맞게 몸과 마음의 감각과 지각을 하면 그 현상 또는 사물이 진리 또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된다. 우리의 감각과 지각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감각은 감각기관인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으로 한다. 지각은 지각기관인 뜻(意)으로 한다. 뜻(意)은 자연과학적으로는 각 감각기관과 지각기관을 연결하는 신경세포 및 돌기 그리고 받아들임과 내보냄의 판단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심장을 둘러싼 정신작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물질과 마음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점에서 함께하는 것이 물질과 마음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원인이 되어 세계가 생겨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생태를 논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몸에 관해서 먼저 다뤄야 하고 그 연결선상에서 생태를 연구해야 한다.
  나(우리)의 몸 생태, 정신생태, 주위생태가 떨어진 별개의 낱생태가 아니라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온생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재 하나하나의 몸 생태가 바로 몸 생태와 주위생태이며 거기에 깃든 마음(정신)이 정신생태이므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몸 생태와 주위생태와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에 정신생태가 연결되면서 바람직한 행(行, sankara) 즉 하려고 하는 마음, 마음이 꾀하는 바, 의도라고 번역되는 마음의 행동이 작용하게 된다. 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행동하면 바람직한 결과가 이끌어질 것이다. 즉 모든 생태가 공유하는 최대한의 행복(幸福, sukkha)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행동하면 그 반대의 결과가 얻어질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태에게 괴로움(苦, dukkha)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 잘못된 정보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바로 나와 생태 그리고 정신 즉 몸 생태와 정신생태 및 주위생태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 생태를 행복하게 한다면서 주위생태를 불행하고 괴롭게 하여 결국은 몸 생태와 정신생태도 괴롭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옹기를 많이 만들기 위해 옹기 굽는 이를 데려오라는 스승의 분부를 새기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의해 옹기를 깨어버린 나귀를 데려 간 제자에게 스승이 말한 ‘만드는데 며칠, 몇 개월, 몇 년 걸린 것을 잠깐 동안에 부숴버리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저지르고 있다. 만들어지는데 수억 년이 걸린 지하자원을 몇 백 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써버린다. 군대 가는 아들에게 ‘절대 콩나물은 먹지 말라.’고 말했다는 어리석은 아버지가 ‘멜라민’ 등 생태에 해로운 것을 음식물 등에 넣는 것이다. 아들이 콩나물을 빼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거니와 다른 음식물은 또 그런 아버지가 없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음의 변화에 따라 겪게 되는 변이고(變異苦)를 겪는 것이다.
  불교의 교학이 발달하면서 중국의 천태종에서는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사상을 제기했다. 즉 우리 중생을 정보(正報)라 하고 환경을 의보(依報)라고 하는데 그 둘이 본래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야기다. 즉 둘로 나눠진 것 같지만 하나인 생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발전하여 모든 중생이 어느 부처의 전생이라는 설을 넘어서 모든 존재가 부처이므로 우리가 함부로 대했던 풀과 나무마저 부처가 된다는 초목성불론(草木成佛論)으로 발전하였다. 화엄종에서는 세계의 구조를 우리 자신을 하나의 세계 또는 우주로 보고 그것을 중생세간(衆生世間)이라 한다. 또 그를 둘러싼 환경을 기세간(器世間)이라고 한다. 기세간의 기((器)는 그릇을 뜻하는 것으로 음식이 물들면 그릇도 물들고, 그릇이 물들면 음식도 물든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는 불자로서의 삶을 계(戒, sila)라고 한다. 승려와 신도 할 것 없이 모든 불자가 지녀야 할 첫 번째 계가 바로 생태에 위험을 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을 죽이지 말라(不殺生戒)는 계라고 한다. 불자의 행동 지침인 계에는 이 외에도 모두 생태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과 말과 행동을 담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생태와 스스로를 포함한 전생태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삶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불자 모두 지켜야 할 5계, 예비스님인 사미가 지켜야 할 10계, 정식 스님인 비구(男)가 지켜야 하는 250계, 정식 스님인 비구니(女)가 지키는 348계, 대승의 보살도를 서원한 불자가 지녀야 하는 보살 10중 48경계 모두가 그렇다. 예를 들면 물속의 벌레를 해롭게 하지 않고 물속의 벌레나 이물질로 인해 나의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반드시 물주머니를 사용하라, 물, 풀 등을 조심히 다루라고 하는 등 어떤 것은 속으로 품고 있는 의미가 그런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기도 하다.
  생태보전을 위해 애쓰는 이들이 살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생태를 보전하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내 자신의 생태를 위협하는 방법론을 쓰는 것이 과연 생태적으로 옳은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태보전의 중요성을 비경제적 가치로 표현하는 일이다. 현대는 자본주의 시대로서 경제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의식적으로 외면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경제적 가치를 반드시 논의의 표면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주장을 논리적으로 잘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동일가치로 다른 개념을 분석해서 그 값을 비교해야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를 얻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하는 것과 경제적 가치를 얻기 위해 자연생태를 보전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총량으로 비교해서 생태를 보전하는 것이 부가가치가 크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 시대에서도 보다 나은 경제적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생태를 보전해야만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생태를 평화롭게 하는 것은 바로 가장 고귀한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모든 존재(생명체)는 태어나야 할 것들이고 행복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가 일생 자녀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듯이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수양해야 한다. 무한한 자비심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증오와 적개심 없이 온 누리에 펼쳐야 한다. 서 있든, 앉아 있든, 누워 있든 그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마음속에 두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장 고귀한 삶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이용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럴 때는 ‘꿀벌과 나비가 꽃의 향과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꿀을 모으듯이’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존재들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생태적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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