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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誤)에서 맞음(正)으로 회통하는 불교생태사상-5

(2) 정신 생태의 이해

  그러면 정신작용은 무엇일까? 뇌와 심장이 모두 살아 있을 때 정신작용을 한다. 정신 작용은 수, 상, 행, 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작용은 정신만의 독립적인 작용이 아니라 물질을 인연하여 발생하는 반응을 포함하는 말이다.


“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이들 셋의 화합(和合)이 촉(觸)이다. 촉에서 수(受), 상(想), 사(思)가 함께 생긴다. 이들 네 가지가 비물질적인 온(蘊)이다. 안과 색과 이들 법을 사람이라 부르고, 이들 법에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 그리고 이와 같이 이야기 한다.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 마음으로 사물을 인식한다고. … 또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이 존자는 이름이 이러하고, 이렇게 태어났고 … 이와 같이 오래 살다가 이렇게 목숨을 마쳤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은 관념이며, 기억이며, 언설이다.”

  정신적인 작용과 이름 즉 단어, 개념에 관한 설명이다. 보기를 들어 눈으로 꽃을 보고 꺾었을 때의 정신작용과 사고 및 행동의 과정을 설명해보자. 꽃을 꺾기 전에 아름답다고 하는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아름답다고 하는 느낌 이전에 옛날에 저렇게 생긴 것은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아름답다고 느끼기 전의 아! 이것! 하는 정신작용을 촉(觸)이라고 한다. 감각기관인 눈(眼)이 감각대상인 색(色)을 만났을 때 눈으로 식별함(眼識)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보고 말하는 표현이 바로 ‘세 가지가 화합함이 촉(觸)’이라고 하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눈으로 물건이나 모양을 보면 OO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때의 정신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셋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촉에서 좋다, 나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감각적 느낌이 다가오는 것을 수(受)라고 한다. 그에 따르는 감각 내용과 느낌 그리고 개념 등의 연상 작용(聯想作用)이 지각되는 것을 상(想)이라 한다. 이 상에 의해 형성된 감정이나 의식적 정보를 따라서 분별작용이 생기는 것을 사(思)라고 한다. 이런 작용에 의해서 어떤 물건이나 현상을 보았을 때, 소리를 들었을 때 … 정신적, 물리적, 화학적, 수리적, 논리적 현상을 대했을 때 우리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경험적 정보에 의해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의 경험적 정보에 의해 흔히 우리가 실재(實在)라고 알았던 것이 사실은 관념이며, 과거의 연상에 따른 기억이며 그것을 말이나 글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관념이며 기억이며 언설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 본 현상 또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생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식(識, ahara)이 모이면 신(身, kaya)이 모이고, 식이 멸하면 신이 사라진다. 촉(觸)이 모이면 수(受)가 모이고, 촉이 멸하면 수가 사라진다. 명색(名色)이 모이면 마음(心)이 모이고, 명색이 없어지면 마음이 사라진다. 기억이 모이면 현상(法, dhamma)이 모이고, 기억이 없어지면 현상이 사라진다.”

  현상(法, dhamma)은 영어의 phenomena에 해당하며, 그것을 한자어로는 法으로 옮기면서 약간 의미가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법은 일반적으로 법칙(law) 또는 진리(truth)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dhamma는 현상 또는 사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거기에 맞게 몸과 마음의 감각과 지각을 하면 그 현상 또는 사물이 진리 또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된다. 우리의 감각과 지각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감각은 감각기관인 눈(眼), 귀(耳), 코(鼻),혀(舌), 몸(身)으로 한다. 지각은 지각기관인 뜻(意)으로 한다. 뜻(意)은 자연과학적으로는 각 감각기관과 지각기관을 연결하는 신경세포 및 돌기 그리고 받아들임과 내보냄의 판단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심장을 둘러싼 정신작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물질과 마음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점에서 함께하는 것이 물질과 마음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쌍윳따 니까야』에서는 “마음이 원인이 되어 세계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마음이 원인이 되어 세계가 생겨난다는 말은『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 뿐이라는 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과거의 경험과 새롭게 인식한 정보에 의해 하려고 하는 마음 즉 행(行, sankara)을 말한다. 이 하려고 하는 마음, 의지, 의도가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3) 주위 생태의 이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과 우리를 포함한 생태를 이루고 있는 것들 모두가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구조적으로, 도식적으로 이해되는 단선적인 연결구조가 아니라 아주 복잡한 관계를 가진 연결이다. 그것은 그물망, 인드라망, 섭리, 복잡계의 통섭(通攝) 등의 단어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불교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이 없어진다.”

『맛지마 니까야』의 이 내용은 연기(緣起)에 관한 설명이다. 연기는 다른 경전에서도 무수히 나오는 말로써 서로 관계를 맺어 존재하고 발생하며 그 반대의 작용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관계를 우리는 현대적 용어로 생태, 생태계, 생태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생태계의 관계를 주위생태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관계가 바로 생태를 연결망으로 살펴보는 고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를 연구하는 것은 몸생태와 정신생태 그리고 주위생태를 이해하고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연결고리 속에서 빚어지는 생태의 위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위기에서 벗어나는 대안도 마련할 수 있다.
  불교의 교학이 발달하면서 중국의 천태종에서는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사상을 제기했다. 즉 우리 중생을 정보(正報)라 하고 환경을 의보(依報)라고 하는데 그 둘이 본래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야기다. 즉 둘로 나눠진 것 같지만 하나인 생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발전하여 모든 중생이 어느 부처의 전생이라는 설을 넘어서 모든 존재가 부처이므로 우리가 함부로 대했던 풀과 나무마저 부처가 된다는 초목성불론(草木成佛論)으로 발전하였다. 화엄종에서는 세계의 구조를 우리 자신을 하나의 세계 또는 우주로 보고 그것을 중생세간(衆生世間)이라 한다. 또 그를 둘러싼 환경을 기세간(器世間)이라고 한다. 기세간의 기((器)는 그릇을 뜻하는 것으로 음식이 물들면 그릇도 물들고, 그릇이 물들면 음식도 물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우리)의 몸 생태, 정신생태, 주위생태가 떨어진 별개의 낱생태가 아니라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온생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재 하나하나의 몸생태가 바로 몸 생태와 주위생태이며 거기에 깃든 마음(정신)이 정신생태이므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몸 생태와 주위생태와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에 정신생태가 연결되면서 바람직한 행(行, sankara) 즉 하려고 하는 마음, 마음이 꾀하는 바, 의도라고 번역되는 마음의 행동이 작용하게 된다. 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행동하면 바람직한 결과가 이끌어질 것이다. 즉 모든 생태가 공유하는 최대한의 행복(幸福, sukkha)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행동하면 그 반대의 결과가 얻어질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태에게 괴로움(苦, dukkha)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 잘못된 정보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바로 나와 생태 그리고 정신 즉 몸생태와 정신생태 및 주위생태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 생태를 행복하게 한다면서 주위생태를 불행하고 괴롭게 하여 결국은 몸 생태와 정신생태도 괴롭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옹기를 많이 만들기 위해 옹기 굽는 이를 데려오라는 스승의 분부를 새기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의해 옹기를 깨어버린 나귀를 데려 간 제자에게 스승이 말한 ‘만드는데 며칠, 몇 개월, 몇 년 걸린 것을 잠깐 동안에 부숴버리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저지르고 있다. 만들어지는데 수억 년이 걸린 지하자원을 몇 백 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써버린다. 군대 가는 아들에게 ‘절대 콩나물은 먹지 말라.’고 말했다는 어리석은 아버지가 ‘멜라민’ 등 생태에 해로운 것을 음식물 등에 넣는 것이다. 아들이 콩나물을 빼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거니와 다른 음식물은 또 그런 아버지가 없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음의 변화에 따라 겪게 되는 변이고(變異苦)를 겪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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