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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誤)에서 맞음(正)으로 회통하는 불교생태사상-4

2. 생태와 불교

  1) 엔트로피증가의 법칙과 연기설(緣起說)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을 인정하는 뉴-튼적 고전물리학의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발견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두 가지 상대성이론도 사실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즉, 상대성이론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학 법칙들이 ‘잠정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상대성이론을 포괄하는 원리가 발견되리라고 본다.
  현대 자연과학이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하고 있는 단 하나의 법칙은 바로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원리이다. 이 법칙이 시사하고 있는 우주(중생계) 및 인류(중생)의 미래는 자못 심각하다. 지구를 포함하고 있는 태양계와 태양계를 감싸고 있는 것은 은하계다.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으며 계속 늘어나는 중인 우주이다. 우주라고 하는 큰, 그러나 닫힌 계(closed system)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불안정성이 증가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국(heat- death)을 맞이할 것이라고 이 법칙은 예언하고 있다.
  개념에서나, 내용에서나, 인류의 생활에 적용되는 범위가 매우 넓다. 그리고 최후의 결과를 불행하게 예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알고 이를 초월하는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이 130여 년 전에 제창된 엔트로피증가 원리가 2600여 년 전에 설해진 연기설에 근접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열역학에서의 엔트로피증가 원리는 수식을 포함해서 단 몇 줄의 글로, 표현한다. 수식을 빼 버리면 ‘모든 것은 쓸모없게 변해 간다.’는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 논리구조가 매우 단순한 듯이 보인다. 또한 연기설도 ‘연(緣)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한 문장이면 그 뼈대가 갖추어진다. 역시 복잡할 것이 없는 법칙이다.
  엔트로피증가 원리의 전제가 되며 겉과 속의 관계에 있는 법칙은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다. 엔트로피증가원리와 함께 열역학의 기둥이 되는 법칙이다. entropy는 그리스어 ‘변화’를 뜻하는 trope에 역할을 강조하는 접두사 en을 붙여서 클라우시우스가 만든 말이다. 역시 ‘변화’라는 개념이 ‘조건에 의존된 발생’이라는 뜻의 연기(paticcasamuppada)와 관련성을 가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변화하기 때문에 즉, 무상하기 때문에 서로 서로가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을 연기라고 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일을 열로, 열을 일로 바꾸는 능력에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는 제한이 가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어진 양의 열을 완전히 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해도 주어진 양의 일을 완전히 열로 바꾸는 것은 어렵다.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 엔트로피증가의 원리이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에서 나중 상태에서 처음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을 가역(可逆)과정이라 한다. 하나의 평형상태로부터 시작하여 또 다른 평형상태로 끝나는 임의의 과정은 계(界, system)및 환경의 불안정성(entropy)이 증가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즉, 계의 불안정성은 계속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대해서 살펴본다면 지구와 우주의 불안정성이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변화’라는 뜻이다. ‘변화’는 시간을 주전제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부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개념이다. 엔트로피증가의 원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닫힌계 안의 변화량 즉 불안정성이 계속 증가한다는 말이 된다.
  한편, 시간이 걸릴수록 변화가 지속되고 그 결과 불안정성이 극도로 증가하여 더 이상 증가할 수 없게 되는 상태(heat death)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계(界)의 파괴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종말론과 관련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계와 환경의 불안정성은 일정하다. 이것은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연기설의 마지막 지분(支分)은 노사(老死)이며, 무명(無明)에 의해 발생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노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한 변화에 순응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한다. 연기설의 설법 목적은 수행(修行)을 하여 열반(涅槃, nirvana)을 얻을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연기설과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이 뜻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관련한 법칙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변화의 끝 즉 종말에 대한 대책은 없는가? 이 점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임은 분명하다. 변화로 대표되는 엔트로피증가원리와 연기의 법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평형열역학 특히 소산구조에 관한 공헌으로 노벨상을 탄 벨기에의 프리고진(I.Prigogine)은

“이론물리학의 두 기본분야인 동력학과 열역학의 관계는 150년 전 열역학이 형성된 이래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수천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이 관계는 시간의 의미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극히 중요하다. 그래서 해답이 쉬웠다면 벌써 오래 전에 해결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現在 해결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쉬운 해답을 예상할 수 없다.”

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시간을 우선적 방향이 없는 매개변수로 취급하는 동력학이 측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비가역성(불안정성)의 요소에 어떻게 도달하게 되는가의 문제가 우리 세대의 가장 뜨거운 문제의 하나이며, 이것이 과학과 철학이 만나게 하는 문제의 하나”

라고 하며, “어떻게 우리가 미시적 세계를 고립시켜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고 묻고 있다. 즉,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계는 전 우주라고 하는 계이며, 고립된 작은 계에서는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복원력(復原力)을 가진 지구와 소비를 최소화 하고 나눔을 최대화 하는 좋은 마음을 키우는 마음 닦는 사람 즉 우리 스스로에 관한 관심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양계 또는 우주에 대해 닫힌계(closed system)인 지구는 우주와 빛의 에너지를 교환할 수 있으나, 물질을 교환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가능하게 된다. 즉, 지구를 조그마한 계라고 생각하는 점에 관심을 집중시켜 보면 불교적 시각에서는 연기와 같은 개념으로 쓰이기까지 했던 계(dhatu)의 의미는 쓰임새가 크다. 이는 프리고진이 “열역학의 근원에서 어떤 변환이 불가능하다는 부정적 선언은 거시적 세계에 속하며, 이 부정적 선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적 구조에 이르도록 한다. 모든 것이 주어진 폐쇄된 우주에서 요동과 혁신에 개방된 새로운 우주로 간다.”고 한 것을 뜻한다.
  모든 존재는 가립(假立)된 것이다. 따라서 자성(自性)이 없다.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 만의 성질이 없다. 이것과 저것 즉 존재와 존재(緣生法)사이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데는 존재관계와 생멸(生滅)관계를 살펴야 한다.
 “현상에 대한 우리의 언명 방식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찰은 문법적인 고찰이다.” 고 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889~1951)의 말처럼 언명방식 즉 문법적인 고찰임이 분명하지만 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표현을 하도록 노력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연기설의 입장에서 본 엔트로피증가의 원리는 변화의 원리에 입각하여 법이 전개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여실하게 보고, 참다운 견해를 지님으로써 불안정성의 역설적 개념인 자유도(degree of freedom)를 최대한 향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현실미계에 깨달음의 세계를 전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수행 즉 마음 닦기와 마음 씀에 의한 생태 의식의 필요성이 요청된다. 그런데 엔트로피증가원리의 경우는 주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연기설의 경우는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요구되어 왔다. 이는 참으로 이상하게 뒤바뀐 것이다.
  ‘시간의 역사’의 저자 스티븐 호킹도 고백했듯이 “순수 객관주의에 입각한 자연과학이 주관을 배제한 결과 우리의 감각기능 대신 현미경, 맥박계, 체온계 등을 이용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미소한 부분 뿐”이었다. 반면에,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공통적인 원리를 교시하는 종교는 전체적인 것을 조감한다. 연기설도 마찬가지이다. 즉, 연기설에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두 다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쪽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저 쪽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또한 어느 한 쪽이나 양 쪽을 물리쳐서도 안 된다. 늘 정확한 거리에서 정확한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을 연기적 중도라고 한다. 따라서 본래 절대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에 나와 너, 개인과 집단 또는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지양하여야 한다. 이제는 시점도 통시적 관점과 공시적 관점을 회통한 중도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대상(존재)도 너와 나의 대립을 떠난 상호보완의 연기적 중도의 원리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개인과 집단의 마음 닦기와 좋은 마음 씀에 의해서 지구라고 하는 닫힌계의 멸망을 피하고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바람직한 계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2) 틀림에서 맞음으로의 회통적 시각

  교통의 발달과 통신망의 진화를 통한 정보공유의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는 여러 가지 커다란 경험과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전에는 전혀 만나지 못했던 민족과 문화를 한 자리에서 만나기도 한다. 이른 바 화상전화(畵像電話)를 통해 서로 만나지 않고도 만난 것처럼 여러 가지 자료와 사람을 앞에 두고 느낌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통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붓다가 지녔던 능력 중에서 이마에 있었다고 하는 흰 털에서 나오는 백호광명(白毫光明)의 위력을 보는 듯도 하다. 그러다 보니 정말 하루가 다르게 지구촌 가족들의 의식구조가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서로 다른 민족(異民族)들이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틀린(誤) 사람들이 모였다는 잘못된 표현을 하였다. 살갗의 색깔이 다르고, 눈동자의 빛깔이 다르며, 코의 높이가 다르게 생긴 것을 틀리게 생겼다고 보았다. 보는 자인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에서 형성된 의식이며 그 의식의 표현이었다. 틀린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다 보니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틀린(誤) 사람이 아니라 다른(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씨족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척도 다르게 생겼고, 한 집안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그랬다. 더더욱 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들도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깨달음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라는 뜻에서 같은(同)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과학적으로는 105종 원소의 유기적 결합을 나름대로 한 모습이 각각의 존재이므로 구성요소가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지, 수, 화, 풍의 4대로 이루어졌으므로 역시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어느 하나 빼 놓지 않고 어느 부처님의 전생이며 나의 부모형제가 아닌 이가 없다.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맞는(正)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각자의 처지와 시각에서 다르게 보였던 것이 틀리게 느껴졌었으나 이제는 맞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이의 어리석은 행동도 부처의 전생이거나 현생의 행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21세기 지구촌 가족이 공통으로 걱정하고 있는 생태의 문제도 비슷하다. 틀림에서 다름으로, 다름에서 같음으로, 같음에서 맞음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결국 틀림에서 맞음으로 회통하는 것이 생태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사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틀림에서 맞음으로의 회통은 곧 생태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지속이 가능한 발전을 이끌 수 있다. 개발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이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여서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리라는 기대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가치가 되었다. 아직도 과거의 가치개념에 사로잡혀 무조건적인 개발이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생각에서 빚어낸 잘못된 정책의 피해가 정부와 자치단체 그리고 기업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생태의 보존이 가지는 경제가치가 개발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경제가치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 가치관에 편향된 사고를 가진 지도자들이 이끄는 정부에서는 아직도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생태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 일이 흔히 벌어지고 있다. 개발을 통한 경제가치 창출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에 늘 생태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지속가능한 발전 가치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런 사회일수록 사회구성원간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소통의 출발점은 억지로 조정하기 위해 존재형태를 변화시키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존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서 편안하게 놓아두는 것 그것이 소통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태적인 삶이요, 결국 생태위기를 해결하고 벗어나는 방법이다.

  3) 생태에 관한 불교의 이해

  존재 또는 생태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생태적인 삶을 살고 생태위기를 해결하고 벗어난다고 했는데 그러면 생태와 나 또는 우리는 하나인가? 둘인가? 또는 여럿인가? 이에 대한 견해를 바르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견해의 정립을 위해 생태에 관한 불교의 이해를 살피고자 한다. 생태에 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나(우리)의 몸 생태와 정신생태를 이해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이를 둘러싼 주위생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태보존에 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 나서 불교적인 실천방법을 살피고자 한다.

   (1) 몸 생태의 이해

  붓다는 생, 로, 병, 사의 근본 고통을 가진 인생 안에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네 가지 고통을 주목했다. 그것은 첫째,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 둘째, 미워하는 이와의 만남, 셋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 넷째 이 모든 것을 합해서 설명한다면 나의 구성원인 5온(五蘊) 즉 물질(色), 감각(受), 연상(想), 의지(行), 인식(識)의 다섯 가지가 왕성해짐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탐욕(貪慾)을 없애서 평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상을 통해서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고통을 한 가지로 말한다면 오온이 왕성해지려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나의 구성원인 5온(五蘊) 즉 물질(色), 감각(受), 연상(想), 의지(行), 인식(識)의 다섯 가지가 왕성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왜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지, 수, 화, 풍의 4대와 4대가 모여서 된 것들로 이루어진다. 모든 존재와 물질이라는 개념은 땅속을 포함하여 땅에 있는 모든 광물과 그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 동물과 식물 그리고 곤충과 원생동물 등 모두를 포함한다. 또 물속에 포함된 모든 물질과 물속과 물 위에 살고 있는 모든 동식물 그리고 플랑크톤 등을 포함한다. 공중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공중을 이루는 모든 물질, 공중을 통과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이른 바 생태의 물질적 구성요소이다. 4대는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이나 인도의 사상가들이나 여러 곳의 종교, 사상가들이 존재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해 온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 또는 뒷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대(地大)가 흙이요, 수대(水大)가 물이며, 화대(火大)가 불이고, 풍대(風大)가 바람 그 자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흙, 물, 불, 바람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뜻을 헤아리느라 제 뜻, 숨은 뜻을 살피지 못하고 있다. 흙, 물, 불, 바람이 요소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요소라기보다는 성질이라고 보아야 한다. 흙은 흙 자체보다는 흙과 같은 성질, 물은 물과 같은 성질, 불은 불과 같은 성질, 바람은 바람과 같은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지대는 흙처럼 만물 또는 존재를 유지하는 성질 또는 그 반대로 부수는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흙이 지닌 성질과 비슷하거나 같다. 수대는 만물을 깨끗하게 하거나 더럽히는 성질을 말한다. 흐르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 성질도 수대이다. 깨끗하게 하는 정도 또는 흐르게 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성질이 수대이다. 화대는 만물을 따뜻하게 또는 차갑게 하는 따뜻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성질을 뜻한다. 풍대는 움직이는 성질과 멈추게 하는 성질 즉 밀어주는 성질과 붙잡는 성질을 말한다.
  우리들의 몸도 이것들과 이것들의 결합물질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다. 결합하는 방법론은 어떤 힘들에 의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결합력이다. 결합력은 두 가지로 나뉜다. 같은 물질이나 성질끼리 잡아 당겨서 결합하게 하는 힘은 응집력(凝集力)이라고 부른다. 다른 물질이나 성질들이 서로 잡아 당겨서 결합하게 하는 힘은 부착력(附着力)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힘들이 작용해서 결합하게 된다. 이것들이 응집력과 부착력을 매개방법으로 하여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그렇게 되어 나(우리)의 몸과 몸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의 구성 물질들이 서로 매개가 되어 같은 물질을 주고받아서 연결되고 있다. 그렇게 된 물질들(rupa)에 비물질 즉 정신작용(arupa)이 결합하였을 때를 살았다고 하고, 분리되었을 때를 죽었다고 한다. 정신작용 가운데 뇌의 기능이 정지된 것을 뇌의 죽음(腦死)이라고 한다. 심장의 기능이 정지된 것을 심장의 죽음(心臟死)사이라고 한다. 장기기증이라고 하는 현실적 필요 때문에 죽음에 관한 정의를 다르게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뇌뿐만 아니라 심장의 기능까지도 다 정지된 것을 불교에서는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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