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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誤)에서 맞음(正)으로 회통하는 불교생태사상-3

2) 불교와 자연과학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서 ‘종교는 곧 불완전한 과학’으로 보려는 흐름을 과학 환원주의( scientific reductionism)라고 부른다. 이 과학 환원주의를 인정하게 되면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당연한 것 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종교의 유사성 내지 동질성 회복을 위한 모색이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은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라 했다. 막스 플랑크(M. Planck, 1858~1947)는 ‘자연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과학이 필요하고,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도덕과 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충하고 있으며, 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까지 하였다.
  세계관과 인생관 등 매우 기본적인 가정에 있어서 종교와 과학은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때의 과학은 주로 자연과학이고, 종교는 흔히 기독교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충돌의 요인만이 아니라 과학혁명에 중요한 요인으로서 작용하였다고 한다. 그 반면 ‘불교는 과학과 충돌하지는 않았으나, 발전에도 기여할 요인을 갖고 있지 않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상보성(相補性), 불확실성(不確定性), 상대성(相對性)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양자역학 및 열역학의 근대 법칙들이 불교사상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사실, 더욱 오묘한 종교와 더욱 더 세밀한 과학과의 융화에서 그 논쟁은 해결된다. 또 그렇게 융화될 수 있는 넓은 진리의 조화 속에서 비로소 종교의 도덕적, 미적 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종교의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의 종교적 세계관은 고차적으로 병립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는데 있어서의 고전물리학의 기본태도는 관찰의 대상이 되는 물체(물질)는 관찰자의 주관과 관계없이 ‘거기 존재’해 있는 것으로 보는 순수 객관주의였다. 철저히 주관을 배제했기 때문에 주관적인 감각기관은 사진기, 온도계 등으로 대체되었다. 이에 의해 파악된 시간, 공간 등의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말경에 성립된 양자론의 불확정성원리 및 20세기 초에 성립된 상대성이론에서는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관찰되는 대상의 특성이 변화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대적인 시공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식의 주체인 마음과 대상인 객관적 존재 그 어느 것이 부재하면 사실을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철저히 중도에 입각해서 사물을 관조한다. 따라서 현대 자연과학이 순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접근함에 따라서 두 경향은 한 곳에서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 본질적으로 주·객 2분법의 대립사유구조를 배제하는 중도주의인 불교와의 만남의 가능성이 짙게 되었다. 과거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와는 달리 새로운 과학법칙이 발견될수록 충돌하기 보다는 일치하거나 상보하는 관계에 있게 되었다.

  3) 무원론(無元論)- 지속 가능, 다양성을 위한 이론

  모든 존재는 어떤 것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다름의 존재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평화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제 아주 중요한 공식처럼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우주의 근원이 몇인가에 관한 이론 즉 원론(元論)이 자리 잡고 있다. 물체를 쪼개 들어가면 그의 원형질인 물질(物質)을 만나게 된다. 물질을 더 작게 나누어 가면 가장 작은 알갱이어서 근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 원소(元素)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한 원소가 자연계에 105종이나 있다. 그 가장 작다고 생각한 원소를 5종이나 더 만들어 현재는 110종의 원소가 있다고 한다. 그들 원소들 또한 아주 작은 알갱이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쪼개고 또 쪼개면 가장 작은 형태의 원형질(原形質)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과학자와 철학자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최초 출발자가 우주 생성 최초에 있어서 또는 그에 의해서 우주가 만들어져서 다른 것들도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고 나타나게 되리라는 가정에서 정립한 이론이 바로 원론(元論)이다. 우주의 가장 작은 물질 또는 최초의 원인을 원(元)이라 한다. 당연히 가장 작고, 최초 원인이므로 그것을 하나라고 보는 것이 일원론(一元論)이다. 절대자인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사고체계에서 출발하였고 그러한 사고에 합당한 이론이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이 발명한 자연과학 기구를 아무리 발전시켜 관찰해 보아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완전히 재현하면서 바라볼 수도 없다. 또, 가장 작다고 생각하는 것도 관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그것은 어쩌면 하나가 아닌 두 개가 아닌가 하는 사고가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이원론(二元論)이다. 예를 들면 물질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원론 또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나타나면서 다양한 근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이를 다원론(多元論)이라 한다. 이는 다민족, 다종교, 다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는 효용성이 큰 이론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일어난 종교다원주의는 그러한 현상의 하나일 따름이다. 일원론이나 이원론에 비하면 다원론이 그나마 받아들일 틈이 있는 생태주의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곳곳에서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다원은 단어 안에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근원은 논리적으로는 하나라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를 중심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불일불이론(不一不二論)이 나타났다. 이는 줄여서 불이론(不二論=non-dualism)이라 하기도 한다.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쓰임도 많다. 하지만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둘은 아니어도 셋이나 넷 또는 그 이상이라는 추론도 가능한 것이어서 단어 자체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불이(不二)라는 말도 불이(不異)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하나도 아니며 많은 것도 아니다’ 또는 ‘하나로 같지도 않고 많아서 다르지도 않다’는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모든 것들의 근원이 하나라는 일원론(一元論)은 이미 부정되고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며, 둘 이상은 단어와 논리 자체에 모순이 있는 개념이다. 이원론이나 다원론 또는 둘이 아니라는 이론보다 단순하면서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은 혹시 없을까?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는 사상, 근원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찾아내지 않는 사상이 있지 않을까?  어떤 근원을 가정하면 근본주의에 빠져서 다른 사상들과 다투기 쉽고 근원이 없다고 하는 무원(無元)이라야 평화로운 생태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서 무원론(無元論)에 입각한 무원주의(無元主義)를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장 작은 하나의 점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어느 존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간다고 해도 끝내 하나의 점이나 하나의 근본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현재의 상태와 수준에서 그리 보이고, 그렇게 생각될 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믿음의 법칙, 마음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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