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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는 다신전에 있다(2)

<초의스님>

초의는 다신전에 있다

다신(茶神)이라는 말은 다신전 포법(泡法: 우리는 법) 조항에 “빨리 거르면 다신(茶)이 제대로 피어나지 않고, 늦게 마시면 섬세하고 좋은 향기가 먼저 사라져 버린다.”의 구절에 있다. 또 같은 책 탕용노눈(湯用老嫩: 어린물과 늙은물의 쓰임) 조항에 “차를 끓여보면 다신이 바로 뜬다.”라고 되어 있다. 그 내용에서 힌트를 얻어 다신전이라는 제목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학습용으로 채다론을 베꼈지만 자신의 생각 없이 무조건 필사를 하지 않았다.

다신전이라는 제목은 초의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채다론에서는 다신의 근본을 ‘맛(味)’으로 표현했으나 초의는 ‘향기(香)’로 인식했다. 의도적인 그 생각은 가치가 있다. 그곳이 아니라도 다록과 만보전서에 ‘맛(味)’으로 표현해 놓은 곳을 초의는 다신전에 ‘향(香)’으로 바꾸었다. 비록 하나의 글자지만 생각 다운 생각, 차에 대한 독자적 인식이 없다면 쉽게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다신전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고 해서 다신전이 초의의 저서는 아니다. 또 초의가 스스로 베꼈다고 분명 밝혔는데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다만 필자가 동다송에 수록한 다신전을 '다록'이라고 원래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은 초의 스님을 존중해서다.

또 초의의 생각은 다신전으로 제목을 바꿔 단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았다. 초의는 자신의 독자적 생각에 갈등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 갈등의 흔적에서 인간적인 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또한 신선하다.

명나라 주원장이 떡차를 생산을 중단한 이후 엽차 시대로 돌입했다고 하지만 남송(南宋) 때부터 이미 엽차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초의가 살던 시대까지는 800년이 넘는 세월의 차이가 있다. 책으로 차 만드는 방법을 배워야 했던 초의는 그 긴 시대의 구별을 두지 않고 떡차를 만들기도 했고 엽차를 만들기도 했다.

당대 육우의 다경을 참고해 떡차를 만들었을 것이고, 만보전서를 베끼면서 엽차를 만들었을 것이고, 속다경을 읽으면서 온갖 차 만드는 방법을 참고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면서 경험을 터득했을 것이다.

책과 현실 사이의 정신적 갈등과 초의의 생각 또는 시대의 현실이 집약되어 표현한 곳은 동다송이 아니라 다신전이다. 차에 대한 그런저런 지식들이 동다송의 시구를 이루는 재료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동다송에는 떡차가 따로 있고 엽차가 따로 있지 않다. 동다송이 시의 형식을 띄었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협주였을 터였다. 차(茶)에 대한 역사적, 문헌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시구가 필요했을 형식을 띤 동다송에 실질적인 주체적 초의는 없다. 있다고 해도 너무 미미해서 민망할 정도다.

그렇다고 동다송이 초의의 저술이 아니며 가치가 없단 말인가? 동다송에는 초의의 문학적 재능이 두드러져 가치 측면에서 허전한 우리 마음을 달래준다. 초의는 세 종류의 다서를 재료로 붓놀림의 확신과 자신감을 선사한다. 무언가를 발견 하고 발명한 사람보다 응용하여 활용하는 사람의 위용이 세상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초의는 다신전에 다인으로 살아 있다. 다신전 없이 초의나 동다송을 논할 수 없다. 동다송이 탄생되기까지 초의의 정신의 차 토양은 다신전이다. 우리 것이 아니라고 밀어낼 필요도 없다. 편협한 마음은 차를 이해하는데 장애이며 초의의 실체를 외면하는 것이다. 지구촌에 온전히 내 것이다 네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유성이 존재나 하며 대체 몇 개나 될까?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는 가치에 목적을 두는 것이 차의 세계에서 우리의 목표다. 그런 열린 마음이 바로 다인(茶人)의 바람인 성차득차(成茶得茶)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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