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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7

 

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7

 

 

一然은 󰡔三國遺事󰡕를 통해 占과 豫言을 소개하면서 “占을 쳐보면 마음과 소행이 서로 일치되면 감응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이르지 않으니 이름하여 虛謬라고 한다.”며 占을 치는 복술자, 당사자 모두 同氣感應이 있고 한결같은 마음이 있을 때만 그 바라는 바 성취된다고 보고 있다.

風水信仰은 묘나 집터가 지역에 따라 길흉이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어떤 지세나 땅의 형세는 복을 받을 수 있다거나 또는 화를 당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은 풍수가 길흉화복을 점치는 民間信仰이다. 風水地理說은 불교의 흥성에 비례하여 상당히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불교가 주로 지배세력과 밀착되어 경주중심으로 발전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부수되어 전래된 風水地理說도 왕궁이나 왕릉 및 지배세력과 연결된 사찰의 基地선정 등 경주를 중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산천의 흉한 형세로 빚어지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풍수적 견지에서 黃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것이 바로 산천의 형세에 대처방법으로서의 佛塔을 활용하였다는 것은 이후 羅末麗初에 비보사탑설의 공간적 정립 이유 및 정치주도 세력에 의한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首露王이 도읍으로 정하는 등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풍수를 믿었다는 수준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는 민간에도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遺事󰡕에는「南解王條」,「五臺山 月精寺」,「仙桃聖母 隨喜佛事」,「迦葉佛宴坐石」,「蛇卜」,「義湘大師의 洛山」,「寶川과 孝明」, 「生義寺」.「景德王의 栢栗寺」,「法王寺」,「慈雲寺」,「王輪寺」,「內帝釋寺」,「舍那寺」,「大禪(보제)院」,「新興寺」,「文殊寺」,「圓通寺」,「地藏寺」등 풍수적 내용이 포함된 民間信仰的 요소가 보이는데 이에는 풍수적 내용은 물론 다양한 민속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최치원의「大嵩福寺碑銘」또한 8세기 말 신라왕실의 왕릉지 선정을 둘러싸고 풍수와 불교가 벌이는 문화교섭의 양상의 내용 중에 伸張하는 문화요소인 풍수가 기존의 지배적문화요소인 불교와 경합하다가 채택되어 수용되는 교섭과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려에는 불교와 풍수설이 결합된 道詵의 비보설이 국토계획과 사원의 운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고려조를 전국적으로 산재한 비보사찰을 통하여 풍수가 전국적인 범위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고려조정이 승려에게 풍수와 관련된 관직을 주어 일을 담당케 했으며, 주요한 풍수에 대한 자문을 승려가 담당했다는 사실도 풍수의 확산에 미친 불교적 영향을 확인시켜준다.

역사상에서 풍수와 불교는 융합적인 문화형태로 교섭되어 사찰의 입지 및 기능, 사회ㆍ공간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풍수의 도입 및 확산, 비보사탑설의 전개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풍수와 불교는 신라 하대에 선종의 전래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羅末麗初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공간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걸쳐서는 왕권의 중앙 집중 및 지방의 효율적인 통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적극 활용되었다.

풍수는 땅과 바람 그리고 물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탄생·삶·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배해온 것이다. 풍수의 발생과 관련 중국 양자강 주변에서 물의 범람을 이겨나가는 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자생풍수의 기원으로 고인돌에서 찾기도 한다. 단순히 고대인들의 무덤으로써 고인돌이 아니라 비보적 의미로 한반도를 떠받들어준 한반도 기원설이 이번 연구의 성과였다. 이후 풍수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檀君의 神市 선정, 王儉의 符都건설, 新羅 脫解王의 半月城 선정, 善德女王의 지기삼사에서 옥문지 관련 기사,「오대산 월정사」,「선도성모 수희불사」조 등을 통해 살펴본 결과 우리의 풍수역사는 불교의 택지 풍수와 함께 했음을 연구결과 밝힐 수 있었다. 불교와 풍수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불국토설과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符籍이란 字典에 符는 祥瑞, 證驗, 爲信의 뜻으로 원래는 하나씩 쪼개어 떨어진 목판이나 대쪽이 서로 부합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이룸으로서 祥瑞, 證驗, 爲信의 靈跡을 나타낸다는 데서 유래된 글자라 하였다.

佛敎符籍은 크게 呪術的인 것과 非呪術的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주술적인 것이란 『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이다. 『千手多羅尼』, 『노다라니』 같은 密敎를 부적화 하거나 穢跡金剛의 禁百變符나 염술 신앙의 일부에서 파생된 부적을 신앙하는 것이고 非呪術的인 것은 󰡔金剛經󰡕, 󰡔法華經󰡕같은 顯敎나 法性偈 降魔偈 같은 조사의 게송을 부적화하여 신앙하는 것인데 다 이는 그들 경전의 공덕에서 연유된다.

民間信仰과 佛敎의 習合은 긍정적으로 살펴보면 불교의 土着化 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부정적으로 보면 佛敎의 民俗化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혼재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앙하는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태도는 전통을 보는 바른 시각에 서 있는 것이 된다.

본 硏究는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불교의 慣用的 包括主義와 습합이론을 통해 민간신앙이 우리 정서에 맞도록 변형 내지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논고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 佛敎와 民間信仰 간의 습합현상을 통해 또 다른 신앙형태를 창조해 놓은 것은 순수한 종교나 순수한 종교사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한 종교인은 불가피하게 여러 종교 전통의 사상적 유산을 동시에 수용하게 되며 이때 전혀 이질적인 종교사상 전통의 요인들을 무궤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수용자의 정신적 욕구의 성격에 맞는 요인들을 그 욕구의 맥락에 입각해서 받아들이게 되면서 습합이론과 함께 성립되는 결과를 낫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民間信仰과 佛敎의 습합으로 민속불교화되는 것은 불교의 土着化라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불교의 民間信仰化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불교의 엄밀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태도는 전통을 보는 바른 시각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타문화 이해를 위한 비교민속의 적절한 비교장치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생존 양태를 규명하는 데도 佛敎民俗은 불가결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앞으로의 불교의 大衆化와 生活化, 즉 佛敎의 土着化를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佛敎民俗學이 관심의 영역이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土着文化와 外來文化의 相關關係를 제시되고, 우리의 土着文化가 外來文化를 수용하는 데 어떤 방법이 동원되었고 어떻게 갈등을 해소하였으며 화해하는가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문화의 생존 양태를 규명하는 데도 佛敎民俗은 불가결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연구영역의 확장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최치원의「大嵩福寺碑銘」또한 8세기 말 신라왕실의 왕릉지 선정을 둘러싸고 풍수와 불교가 벌이는 문화교섭의 양상의 내용 중에 伸張하는 문화요소인 풍수가 기존의 지배적문화요소인 불교와 경합하다가 채택되어 수용되는 교섭과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려에는 불교와 풍수설이 결합된 道詵의 비보설이 국토계획과 사원의 운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고려조를 전국적으로 산재한 비보사찰을 통하여 풍수가 전국적인 범위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고려조정이 승려에게 풍수와 관련된 관직을 주어 일을 담당케 했으며, 주요한 풍수에 대한 자문을 승려가 담당했다는 사실도 풍수의 확산에 미친 불교적 영향을 확인시켜준다.

역사상에서 풍수와 불교는 융합적인 문화형태로 교섭되어 사찰의 입지 및 기능, 사회ㆍ공간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풍수의 도입 및 확산, 비보사탑설의 전개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풍수와 불교는 신라 하대에 선종의 전래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羅末麗初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공간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걸쳐서는 왕권의 중앙 집중 및 지방의 효율적인 통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적극 활용되었다.

풍수는 땅과 바람 그리고 물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탄생·삶·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배해온 것이다. 풍수의 발생과 관련 중국 양자강 주변에서 물의 범람을 이겨나가는 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자생풍수의 기원으로 고인돌에서 찾기도 한다. 단순히 고대인들의 무덤으로써 고인돌이 아니라 비보적 의미로 한반도를 떠받들어준 한반도 기원설이 이번 연구의 성과였다. 이후 풍수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檀君의 神市 선정, 王儉의 符都건설, 新羅 脫解王의 半月城 선정, 善德女王의 지기삼사에서 옥문지 관련 기사,「오대산 월정사」,「선도성모 수희불사」조 등을 통해 살펴본 결과 우리의 풍수역사는 불교의 택지 풍수와 함께 했음을 연구결과 밝힐 수 있었다. 불교와 풍수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불국토설과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符籍이란 字典에 符는 祥瑞, 證驗, 爲信의 뜻으로 원래는 하나씩 쪼개어 떨어진 목판이나 대쪽이 서로 부합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이룸으로서 祥瑞, 證驗, 爲信의 靈跡을 나타낸다는 데서 유래된 글자라 하였다.

佛敎符籍은 크게 呪術的인 것과 非呪術的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주술적인 것이란 『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이다. 『千手多羅尼』, 『노다라니』 같은 密敎를 부적화 하거나 穢跡金剛의 禁百變符나 염술 신앙의 일부에서 파생된 부적을 신앙하는 것이고 非呪術的인 것은 󰡔金剛經󰡕, 󰡔法華經󰡕같은 顯敎나 法性偈 降魔偈 같은 조사의 게송을 부적화하여 신앙하는 것인데 다 이는 그들 경전의 공덕에서 연유된다.

民間信仰과 佛敎의 習合은 긍정적으로 살펴보면 불교의 土着化 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부정적으로 보면 佛敎의 民俗化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혼재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앙하는 한국 불교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태도는 전통을 보는 바른 시각에 서 있는 것이 된다.

본 硏究는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불교의 慣用的 包括主義와 습합이론을 통해 민간신앙이 우리 정서에 맞도록 변형 내지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논고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 佛敎와 民間信仰 간의 습합현상을 통해 또 다른 신앙형태를 창조해 놓은 것은 순수한 종교나 순수한 종교사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한 종교인은 불가피하게 여러 종교 전통의 사상적 유산을 동시에 수용하게 되며 이때 전혀 이질적인 종교사상 전통의 요인들을 무궤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수용자의 정신적 욕구의 성격에 맞는 요인들을 그 욕구의 맥락에 입각해서 받아들이게 되면서 습합이론과 함께 성립되는 결과를 낫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民間信仰과 佛敎의 습합으로 민속불교화되는 것은 불교의 土着化라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불교의 民間信仰化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불교의 엄밀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태도는 전통을 보는 바른 시각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타문화 이해를 위한 비교민속의 적절한 비교장치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생존 양태를 규명하는 데도 佛敎民俗은 불가결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앞으로의 불교의 大衆化와 生活化, 즉 佛敎의 土着化를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佛敎民俗學이 관심의 영역이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土着文化와 外來文化의 相關關係를 제시되고, 우리의 土着文化가 外來文化를 수용하는 데 어떤 방법이 동원되었고 어떻게 갈등을 해소하였으며 화해하는가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문화의 생존 양태를 규명하는 데도 佛敎民俗은 불가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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