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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관계 연구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관계 연구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Ⅰ. 序 論

1. 問題의 提起

이 논문은 불교전래 이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전해져온 민간신앙이 불교 전래 이후 어떻게 습합되고 있는가 하는 양상을 『三國遺事』속에 내재된 민간신앙을 대상으로 하여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갖는 한국불교사에서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제는 크게 보아 종교사상사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면서 매우 특이한 양상을 지닌다. 그것은 종교사의 일부분이자 민간신앙과도 관계가 있으며, 그러면서도 순수한 종교사나 포괄적인 종교사상사 중 어느 편에도 전적으로 귀속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연구의 주제는 그 성격 및 논의의 의의 자체가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먼저 제기하고 이에 대해 대답을 마련할 필요를 느낀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도교, 유교 등의 사상보다 민속신앙과 습합관계가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여러 民間信仰 중 불교와의 입장에서 그 수용의 모습이 두드러진 상관관계가 있는 민간신앙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高麗 이전의 우리 고대 문화와 佛敎史書, 說話集成集, 佛敎信仰을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 雜錄的 野書, 野史 등을 포함하고 있는 여타의 전적들보다『三國遺事』에 포함된 여러 민간신앙이 갖는 각별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民間信仰과의 습합의 양상이 한국불교사와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왜 중요하며 어떻게 연구되어야 할 것인가?

외래 종교인 도교와 유교, 불교는 일찍이 우리에게 전래되었다. 이 세 종교는 서로 넘나듦을 인정하면서 민간신앙과 습합의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해 왔는데 儒彿習合, 道佛習合, 巫佛習合으로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그것이 하나의 宗敎思想으로 민간에 자생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土着信仰을 토대로 정착하려는 작업이 필요 했다. 우리 민족 역시 다른 원시 민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숭배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 하늘과 귀신에 제사를 지내고 태양과 산악을 숭배하였으며, 그리고 不可抗力의 災殃이 생기면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과 땅에 祈祀하고 靈星 및 기타 귀신을 모셨다. 이렇게 하늘을 숭상하고 신을 받들고, 산천에 제사지내고 여러 귀신을 높이는 사상은 별다른 신앙적 형태를 드러내지 못하고 뚜렷한 종교적인 모습도 갖추지 못한 체 부족국가를 거쳐 三國이 정립되는 시기를 맞이할 때 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원래 불교는 排他性이 없는 가르침으로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전해졌다 하더라도 그 민족성과 환경에 잘 적응하여 그 민족, 국가, 풍토, 습속에 맞는 불교를 이룩할 수 있었기에 우리 민족문화의 정신이나 물질적인 모든 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신라의 花郞徒의 主流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충효사상 등 국가의 사상과 국민정신의 기틀을 마련하고 우리 민간신앙을 민족 신앙으로 승화, 정착시킨 것이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중에서 가장 불교 전래 이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재래의 민간신앙을 민족 신앙으로 승화시켜 정착시킨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佛敎는 당시의 民間信仰이 지닌 신비적이고 靈的인 성격과 함께 呪術的 기능까지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교가 토착신앙과의 습합을 통해 정착하고자 하는 모습들은 佛敎가 필연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시대의 종교관에 基底한 생각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 佛敎는 密敎的인 方便佛敎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 본연의 사상체계를 형성해 나가게 되는데 新羅統一期에 華嚴思想을 기반으로 佛敎 전래 이후의 신앙적 기반을 토대로 토착화되고, 초기의 방편적 기능에 머물렀던 佛敎는 신라사회에 주도적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伽藍의 입지 장소가 민간의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지던 지역에 선정된 사실에서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佛敎 전래 이전부터 民間信仰의 한 형태인 仙風의 聖스러운 領地로서 인식되었던 곳에 伽藍을 입지케 한다는 것은 신라 당시 사상적으로 우위에 있는 佛敎가 기존의 民間信仰의 神聖槪念을 대신하고자 했던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佛敎와 民間信仰의 習合이란 의미로 볼 수 있겠는데, 佛敎의 자연관이 신성한 장소를 택해야 한다는 교리적 측면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사상적으로 高等한 논리를 갖고 있었던 佛敎가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논리를 지닌 기존의 民間信仰을 흡수하여 佛敎로 대체하려는 의도적인 측면이 더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민중들의 불교 수용에 있어서 그 습합의 형태는 민간신앙이란 측면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속신앙은 현세의 복락과 구원을 바라는 민중들의 자연발생적인 열망을 담은 신앙체계이고, 이에 반해 佛敎는 정제된 윤리이자 만물의 본질을 규명한 진리구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양자의 習合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일차적으로 우위의 이념체계인 불교가 하위의 신앙체계인 토속신앙을 흡수하며 전개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민속신앙의 요소를 불교 안으로 흡수한 한국불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상위의 개념이 하위로 흐른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이며 사상인 불교가 이 땅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민간신앙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동안의 자연신 숭배의 습속이 불교적으로 정리되고 재래의 신과 신앙이 불교 신앙의 範疇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도교 역시 민속신앙과 습합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불교는 재래의 민간신앙들을 무시하거나 없애지 않고 이에 불교만이 가진 敎化力과 感化的인 요소를 재래의 민간신앙에 더하여 합리적으로 정리하여 民族信仰으로 자리를 잡게 하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三國遺事』는 저자가 書名을 통하여 밝히고 있듯이 史家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해 崔南善은 撰者 一然이 ?野人으로서 아무런 他意없이 古記의 遺珠를 原型대로 收綴하여 博古와 아울러 傳奇의 資를 삼으려 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三國遺事』는 정사의 체제와 다르며, 불교사서인 『海東高僧傳』과도 다르다. 이 책의 제제를 10科로 분류한 것은 梁, 唐, 宋 삼국의 高僧傳과 약간의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불교문화사라로 하기에는 일반사와 혼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三國遺事』는 바로 禪僧인 一然이 당시의 현실의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이 인식한 자국의 역사에 대한 선택적인 서사였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비로소 이 책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책의 내용에는 撰者인 一然 자신의 의식이 보다 크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三國遺事』전편을 통해 一貫되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자주성과 그 문화적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王曆」편에서 ?三國?과 ?駕洛?과 高麗 太祖 까지의 年表를 달고 중국의 年代와 비교한 것과 우리 국사의 시작을 檀君의 古朝鮮으로 부터 잡고 중국 역사의 시조라고 하는 堯와 동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에서 확인된다. 國祖로서의 檀君에 대한 설화는 그것이 훨씬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귀족적 지배계급은 오히려 儒敎的 禮敎의 시초를 箕子에게서 찾고 箕子부터 祀典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一然은 箕子를 檀君의 古朝鮮에 편입시켜놓고 있으면서,「紀異」에서는 三國 이전의 여러 국가를 각각 별개로 놓고 고조선-위만조선-부여-마한으로 이어지는 국사상의 계통을 잡고 箕子는 檀君의 고조선 조 말미에서 약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민족에 대한 자주의 전승이 유원한 것이었다는 인식 아래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동시대에 살았던 李承休에게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의 유원함을 중국과 대등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바로 몽고의 침입으로 초토화된 당시의 현실 하에서 신성한 역사 전통의 원형을 기록으로 나마 남기고 싶은 저항적인 의식의 발로였으며, 전쟁의 참화 속에서 자주와 평온을 갈구하던 선승의 念願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것에 대한 자주의 전승의 유원함을 인식한 것에서『三國遺事』의 사료적 가치를 찾는다면 전편의 내용이 神異를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紀異」에서「孝膳」까지 전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佛國土思想, 庶民的 共同體的 생활의식, 자국 역사에 대한 자주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기본적으로 바로 이런 신이한 바탕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一然이 지닌 불교신앙의 세계에서는 역사 속의 神異가 그 실재와 결코 모순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三國遺事』이전에 어떠한 시대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이후로도 그러한 사회의 실현을 희망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불교의 신앙의식으로 많이 윤색된 우리 것에 대한 향수였으며 애착이었다. 이러한 애착은 서민적 애환생활의 外延으로 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그동안 국가의 정권과 귀족 중심의 역사서에서 무시될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신이하고 혹은 서민적 설화의 형태로 전승되어온 역사적인 진실을 감싸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官撰으로서의 사서로서는 불가능할 일이었고, 同族의 역사에 대해 視野를 넓힌 그의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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