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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도 없는 근대 문명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을 보다보면, 건물을 짓는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나온 지렁이 한 마리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는 장면이 나온다. 기초 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파던 중 나온 지렁이 한 마리가 사람들의 일손을 놓게 한 것이다. 그 공사가 티베트에서는 신으로 추앙받는 ‘달라이 라마’가 원해서 짓는 영화관 건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땅 파는 일이 멈추어진 것이다. 주인공 ‘하인리히 하러’는 달라이 라마를 찾아가 이런 식으로는 공사를 진척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방법을 찾아 보셔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티베트인들은 설령 지렁이일지라도 전생에 자신의 어머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함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하러는 일부 사람에게는 땅을 파게 하고, 일부 사람들은 땅에서 나온 지렁이를 다른 곳으로 ‘모시게’ 함으로써 공사를 진행한다.
‘모신다’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정치권이다. 그들은 선거 때면 어김없이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를 향해 ‘모시고 살겠노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당선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권력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모신다.’는 것은 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이 없는 삶에서 나온 말은 공허하다. 이것은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생태시’니 뭐니 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학에 있어서도 삶이 바탕이 되지 않는 시구는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새벽에 일어나 큰 산에 절하고 / 저녁 자리에 들기 전에 / 다시 산에 머리 숙인다. // 말없이 이렇게 하며 산다. / 이러는 것은 아무 다른 뜻이 없다. / 산 곁에서 오래 산을 바라보다 /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 // 무슨 소리를 들었다 할 수도 없다. // 산에게 무엇 하나 묻지 않는다. / 고요히 산을 향해 있다가 홀연 / 자신에게 돌아서는 일 // 이것이 산과 나의 유일한 문답법이다.
                            (이성선 - ‘문답법’ 전문)

봄 산에 들 때 가까운 데로 눈을 두지 않는 자는 생태니 뭐니 말할 자격이 없다. 봄 산에는 알 스는 것들, 알에서 깨는 것들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쓰레기 분리수거라도 철저히 하는 것이 풀 나무에 대한 시 쓰면서 생태시 썼노라고 말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가치가 있는 일이다. 사실 우리는 입으로는 생태를 말하면서 지극히 반생태적인 삶을 살고 있다. 무언가를 ‘모신다’는 것은 구호에 불과하고, 실생활에서는 깔아뭉개고 죽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심’에 앞서 먼저 해야 할 것은 ‘반성’이다.

인간의 죽음을 이제는 / 인간의 죽음이라고 쓰지 말자 / 탐욕의 죽음이라고 쓰자 /부채 상환이라고 쓰자 // 한 때 우리는 이러하였다; 자연이여 / 우리는 너희와 함께 한 이 세계의 경영자 / 경영이란 피를 말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이 일을 / 호랑이가 할 수 있으랴 개미가 할 수 있으랴 / 우리는 너희의 신이었고 하늘이었다 / 때로 너희 중의 한 두 부류가 우리로 인해  /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탓하지 말라 / 가치 없는 자들은 해고 되어야 한다 / 날 뛰지 말라 나무들아 새들아 너희가 한 것이 무엇인가 / 우린 언제고 너희 중 한 둘을 세상에서 / 지워 버릴 수 있다 이따금 너희에게 환경 보호니 녹색혁명이니 / 몇 개의 구호를 내세웠지만 고백하건대 그것은 /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너희들이 지금 /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온다면 / 우리는 과감히 잘라 버릴 수 있다 / 우리는 모든 것을 보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 농지 정리 된 논에서 잘 자라는 저 벼들을 보라 / 농장에서 줄 맞춰 생산에 몰두한 저 배나무들을 보라 / 착한 자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하다 // 이제야 고백하거니; / 숨쉬는 것부터 먹는 것 하나까지 우리는 / 끝없이 착취하고 있다 아무런 죄스러움 없이 / 우리는 웃고 마신다 쉼없는 노동자 자연이여 / 우리 몸이 생산하는 건 오줌 똥 뿐 / 그것마저 너희에게 돌려주지 않은 지 오래이다 / 너희는 끊임없이 생산하였고 / 우리는 한 때 너희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 날치기처럼 통과시켰다 // 다 망친 지금에야 반성하나니 / 자연이여 부디 / 우리를 용서하지 말라
                            (이대흠 - ‘나무들은 이따금 파업을 한다’ 전문)

풀과 나무, 범이나 사슴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주장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투표권을 준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선거 때마다 ‘모시겠노라.’고 장담을 해놓고, 투표용지의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까불지 말라.’고‘ ’버릇을 고쳐 주겠노라.’고 말할 것이 불 보듯 빤하니 말이다.
따져보면 작금의 환경주의도 인간의 자기위기 의식에서 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이 중심이고, 인간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인간중심주의 사고가 근대문명을 일으켜 세웠고, 그것은 결국 인간인 선 땅을 위태롭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기만 지켜서는 자기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편리를 앞세운 인간의 근대 문명이 종말로 치닫자 인간들은 교묘히 자기를 살릴 방법을 들고 나온 것이 환경론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요원해 보인다. 아무리 자연을 ‘보호’해 보아야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인간중심의 사고를 버리지 않는 한 지구라는 우리의 공동체는 숨쉬기 어려울 듯 보인다.

다람쥐의 건망증은 참으로 위대하다 /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린 / 도토리들이 자라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면 / 상수리나무가 이룬 숲과 / 숲이 불러들인 새 울음소리, / 모두가 다 다람쥐의 건망증 덕분이 아닌가 / 한겨울 눈이라도 내리면 / 파묻어 논 양식을 도무지 찾지 못해 / 부르튼 두 손을 부비며 떨고 있었을 다람쥐 / 그 차디찬 시장기에 가슴 한쪽이 찌르르 아파오긴 하지만 / 다람쥐의 건망증 때문에 세상은 / 그나마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양볼이 뽈통하게 튀어나오도록 양식을 거두고 / 언젠가 고 작은 손이 부르트도록 / 땅속 깊이 심어놓은 한 톨 위에 올라가 무심히 / 뛰어놀고 있는 다람쥐, /제가 본 세상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어 / 자신의 기억 한쪽을 애써 지워버렸나 보다
                            (손택수 - ‘다람쥐야, 쳇바퀴를 돌려라’ 전문)

우리의 문화, 넓게 잡아 동양의 문화는 ‘살림’과 ‘섬김’의 문화였다. 집하나 지을 때도 이미 터 잡고 있는 온갖 생물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이성 중심의 근대문명은 건망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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