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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최고권위자 혜경스님의 불교요체


음력 4월 8일은 석가모니 세존께서 이 세상에 오신 날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온 국민이 익히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는 그날을 경축일, 즉 공휴일로 정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이외의 종교인들도 산으로 강으로 혹은 집에서 휴일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석가모니 세존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옛날 인도에서는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불렀기 때문에 붓다는 우리의 어법상 모음조화의 법칙에 의해 부텨가 되었고 이 부텨가 구개음화하여 부쳐가 되었으며 이후 부처로 되었다고 본다.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가 사람의 몸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진리(眞理)의 체현자(體現者)」라고도 한다. 즉 진여(眞如)가 왔다고 하여 「여래(如來)」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진리를 인격화하여 님이라고 부쳤으니, 부처님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의 진리가 사람의 몸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현재의 우리들과 똑같이 중생의 몸으로 왔다가 오랜 수행 끝에 우주와 하나로 계합(契合)함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더욱이 우주의 참모습은 이러한 것이니, 여러분들은 나의 가르침대로 따르게 되면 인생고(人生苦)에서 해방(解脫)되어 최고의 인격자, 즉 최고의 행복(涅槃)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가르침을 법(法)이라 하여 이에 귀의하고 목숨 바쳐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나와 너 할 것 없이 부처님께서 가르친 그대로 따르며 지키고 있는 것일까?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나 온 일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8식(八識)”이라 생각한다. 8식이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6식(六識)에 마나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을 더한 여덟 가지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처음의 5식(五識)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의해 외계(外界)의 사물을 분별해 아는 마음이며 의(意)란 “이것은 좋다.” “이것은 아름답다.” “이것은 하자” “이것은 하지 말자” 등 순수하게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작용이지만 이상의 6식은 앞에 인용한 설명을 빌리자면 무대 위의 마음이다. 즉 우리가 분명히 붙잡을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마나식이란, 무대 뒤에 있는 마음으로서 우리들이 그것이 있는 줄 모르고 있는 세계이다. 이것은 영원한 과거― 인간이 아직 무생물이었을 때, 혹은 아미바와 같은 홀세포[單細胞]의 생물이었던 때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부터 자기의 몸뚱이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 온 의식을 말합니다. 이것이 아상(我相)이다.
우리들에게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이를 판별하는 의식이 있어 이를 6식(六識)이라고 하며, 이 6식을 통하여 인식된 것은 모조리 제8식(第八識), 즉 아리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되므로 이를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원래 아리아라는 말은 인도말로 저장한다는 뜻이기에 히마라야 산이라는 말도 히마 아라야 산, 즉 눈을 저장한 산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우리들이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받아드리는 경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려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6식과 8식의 중간에 7식(七識)이라는 것이 있어 여기서 자기중심적인 득(得)과 실(失), 호(好)와 불호(不好) 등으로 구분하여 저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7식부터는 무의식(無意識)의 세계에 속한다.
문제는 이 7식, 즉 마나식(末那識)에 있다. 앞에서 이 말나식이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즉 아상을 가지고 판별하여 장식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이 자기중심적인 생각(我相)이 없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저장할 수 있으련만 그 자기중심적인 생각(我相) 때문에 그렇지 못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친다.」

이 시는 윤 동주(尹東柱) 시인의 “서시(序詩)”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웬일인지 중학시절부터 이 시가 마음에 들어 읽고 또 읽으면서 나의 좌우명(左右銘)으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출가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좋고 또 좋아서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시이기도 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진정한 시인은 종교가이다”라고 했다. 윤 동주 시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렇다! 누가 무슨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믿어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불경(佛經)이든 성경(聖經)이든 뜻도 모르고 읽기만 하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읽는다는 것은 그 가르침(經)의 내용을 알기 위해 읽는 것이며 그 경전에서 가르치는 대로 실행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 없이” 살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감하면서도 그렇게 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성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알면서도 어느 틈엔가 화가 치밀어서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거짓말해서는 나쁜 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모면할 셈으로 슬쩍 속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건이나 돈에 대해 욕심을 부리거나 인색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어느 틈엔지 자신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인색한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 뿐인가 남을 미워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한 마음을 억누르려 해도 억누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원초(原初) 무명[無知]”―이를 원죄(原罪)라 해도 좋다―이라는 것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속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면 즉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이며 염불과 선(禪)의 대가(大家)로서 미국에 불교를 널리 전파한 “스스끼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 박사는 “자기 속에는 또 하나의 자기가 있다.”라고 하며 처음의 자기는 변화하는 자기인데 이를 의식적 자기(意識的自己)라 하고 다음의 한 사람은 변화하는 것을 자각하는 자기인데 이를 “본래의 자기”라고 말한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현상을 뚜렷이 알거나 생각하는 마음 즉 자기가 붙잡을 수 있고 자기가 지배할 수 있는 마음을 “의식(意識)”이라 하고 그 의식 밑에 우리 자신으로서는 지배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자기로서는 알 수 없는 마음의 세계가 있으니 이를 심리학에서는 “무의식(無意識)”이라 한다. 이러한 깊은 마음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말나식(末那識) ?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오스트리아”의 프로이드(Freud)박사와 그의 제자 칼?융(Jung,C,G 1875-1961)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이 이러한 마음에 대해 연구하고 정신분석(精神分析)이라는 것을 시작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 심라학자인 들의 말을 빌리면,
「이 무명을 없애면 누구나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 무명에 의해 형성된 “식(識)”―병든 지식(痴)―을 부처님의 지혜인 “반야(般若)”로 바꾸면 누구나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길[道]을 가르친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체경(一切經)』이다.
그런데 이 무명, 즉 무지라고 하는 아상(我相)인 자기중적인 생각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들은 흔히 세상을 바꾸려면 자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분명이 현재의 습관을 바꾸어야만 한다. 이 습관을 우리들은 업(業), 즉 행위라고 하는데 업에는 나쁜 업과 좋은 업의 두 가지가 있다. 좋은 업을 선업(善業)이라 하고 나쁜 업을 악업(惡業)이라 하며 이 악업을 업장(業障)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 업장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계속해서 불행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업장, 즉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빈다고 업장이 소멸된다는 말인가. 자기의 생각, 자기의 행위를 바꾸지 않고서는 천만 번을 부처님께 빈다고 해서 자기의 무의식적인 행위가 바꾸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실천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모든 불자들이 부처님 오신날에 한 번 더 되새겨 주시기 바란다.

혜경 스님은?
<법화경> 연구에만 전념...무욕의 보살행 실천


1933년 전남 여수에서 출생. 56년에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후 불법에 귀의. 법명은 혜경(惠耕) 당호는 회옹(晦翁). 법화불교대학 학장, 재단법인 법화종 유지재단 이사장 역임. 현재 제주도에서 <법화경 해설서> 집필중. 스님은 인문·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해박함과, 활달하면서도 정교한 논리를 펴고 있다. 스님은 지금까지 사찰주지를 맡지 않고 <법화경> 연구에만 전념해왔다. 특히 스님은 사찰을 지어 상좌명의로 불교재단에 등록했으며, 사가에서 상속받은 유산도 전액 불교재단에 전액 기부하는등 무욕의 보살행을 실천해왔다. 저서로는 <법화경 이야기>, <법구경 입문>, <법화삼부경>, <우리말 법화경>, <법화경 총설>, <관무량수경>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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