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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梵本 법화경 제15장 여래가 가진 수명의 길이―

1, 부처님(眞理)의 본체(本體)(2)

 전호(前號)에서 여래의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눈으로 본다면, 생사(生死)라든가, 재세(在世) ․ 멸도(滅度)라고 하는 생멸(生滅)의 상(相)은 없고, 본래상주(本來常住)한다, 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그와 같은 눈을 가지고 부처님을 보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은 항상 현실의 구체적(具體的)인 모습을 가지고, 어떤 세상에서도 그 사람의 앞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은 구원(久遠)의 옛날에 성도(成道)하고, 그 이래, 항상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계시면서, 설법교화(說法敎化)를 계속(繼續)해 왔으며, 그 수명(壽命)도 지금 더욱 다하지 않고, 남겨진 수명(壽命)의 양(量)은, 지금까지의 겁수(劫數)에 갑절(倍)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석가모니불은 진실(眞實)한 멸도(滅度)가 아니고, 방편(方便)으로서 일시적인 멸도의 모습을 취해서 사라들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며, 중생교화(衆生敎化)에 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에 여래가 상주(常住)하여 언제나 세상에 있고 멸도(涅槃)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박덕(薄德)한 사람들은 선근(善根)을 심지 않고, 오욕(五欲)에 탐익(眈溺)하고, 그 결과, 사악(邪惡)한 견해(見解) 가운데 빠져버리고 만다. 또 권태(倦怠)의 마음을 일으켜서, 부처님을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도, 부처님을 공경(恭敬)한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와 같은 중생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멸도(滅度)를 사라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어, 사람들의 마음에 부처님에 대한 연모(戀慕)를 품게 하고, 부처님을 갈앙(渴仰)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교화를 위해 진실(眞實)한 멸도가 아니라, 일시적인 멸도를 보여준다. 즉 불멸(不滅)의 멸(滅)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 연원한 생명을 유지하는 석가모니불의 멸도의 의미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불이 멸도에 든다고 해도, 그것은 석가불(釋迦佛)이라는 존재(存在)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고, 일시적으로 그 모습을 없애는 것에 불과하다. 뒤의 「자아게(自我偈)」라고 불리는 게송(偈頌)에는 「나(我) 항상(常) 이(此)곳에 머물(住)지만, 여러 가지(諸)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以) 전도(顚倒)된 중생(衆生)으로 하여금(令) 가까이(近)이 비록(雖) 있어도 그러나(而) 보이지(見) 않게(不)한다」라고 하며, 마음이 顚倒된 사람에게는 석가모니불의 모습을 보이지 않
게 한다. 라고 하며 「이미(旣) 신복(信伏)하고 마음(意)이 유연(柔軟)하여 일심(一心)으로 부처님(佛)을 뵙고자 원(欲)하여, 스스로(自) 신명(身命)을 아끼지(惜) 않는(不)」사람에게는, 부처님은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이상(以上)의 것을 말한 것이다.
이상(以上)과 같이 본장(本章)에서 처음으로 설해진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에 대해서, 이것을 불신론(佛身論) 상(上)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의 해석(解釋)이 행해져 왔던 것이다.
 불신론(佛身論)은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부처님의 작용(作用)과 속성(屬性) 등의 면에서 붓다(佛陀)의 신체(身體)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고구(考究)되어 온 것으로서, 2신설(二身說), 3신설(三身說), 4신설(四身說) 등이 단계적(段階的)으로 성립(成立)되었다. 대체로
용수(龍樹)의 무렵(3세기 중엽)에는 2신설(二身說)(大智度論에는 法身과 生身이 설해져 있다)이 성립되어 있으며, 세친(世親 : 4세기-5세기)의 『법화경론(法華經論)』에 이르러서 3신설(三身說)이 나타났다. 3신설(三身說)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세친(世親)의 3신설(三身說)은,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의 3신설(三身說)로서, 이것이 불신론에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법신(法身 :dharma-kaya )이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眞理)를 인격화(人格化)한 부처님이며, 이것은 진리(眞理) 그 자체(自體)를 체(體)로 하는 부처님이기 때문에 상주불변(常住不變), 불멸(不滅)의 진리불(眞理佛)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이 진리불(眞理佛)에 반(反)하여, 현실의 육체를 가졌으며, 우리들과 똑같이 수명(壽命)이 다하면, 멸(滅)
하는 부처님을 응신불(應身佛 : nirmana-kaya)이라고 한다(應化身 ․ 化身이라고도). 왜 응신(應身)이라 하는가 하면, 중생교화를 위해서, 진리불이 교화(敎化)의 대상(對象)에 응해서 여러 가지로 신체를 나타내며, 어느 특정한 장소(場所)에 응현(應現)한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시유종(有始有終)이다. 현실의 역사상(歷史上)의 석존은 이 응신불(應身佛)이다. 보신(報身 : sambhoga-kaya)는 이상의 2신(二身)을 보완(補完)하는 성격의 것으로서, 3신중(三身中) 가장 완성된 이상(理想)의 부처님이라 한다. 그것은 인행과덕신(因行果德身)이라 불리는 것처럼,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因行)이 완성되고, 그 결과(結果)로서 얻어진 부처님의 지혜(果德)를 신체로 하는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법신(法身)은 진리(眞理) 그 자체(自體)를 체(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불변(常住不變)이며 보편적(普遍的)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부처님으로서의 인격(人格) 등의 구체성(具體性)을 완전히 결(缺)하고 있다. 응신(應身)은 현실적이며 또한 구체성이 풍부하고 있으나 유한(有限)한 존재(存在)이다. 그러나 보신(報身)은 지혜(智慧)라고 하는 인격성(人格性)을 구비(具備)함과 더불어, 동시에 그 지혜는 진리라는 깨달음의 지혜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법신(法身)으로서의 성격(性格)도 겸하여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성을 가졌으며, 게다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상(理想)의 붓다(佛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이라는 처음이 있어서 비로소 말하는 것이므로 유시(有始)이기는 하지만, 진리의 상주성(常住性)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종(無終)인 것이다.
 위에서 말한 3신설(三身說)에 의해서 종래 해 오던 「수량품(壽量品)」의 본불(本佛)에 대한 해석을 보면, 우선 중국에서는 천태지의(天台智顗) 이전과 이후에서는 크게 해석상의 격차(隔差)가 있다. 지의(智顗)는 법화경에 의해서 중국(中國) 남북(南北) 통일불교(統一佛敎)를 수립한 인물인데, 지의(智顗) 이전의 남조불교(南朝佛敎)에서는 열반경(涅槃經)에서 설하는 상주법신(常住法身)과 법화경의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본불(本佛)과를 대비(對比)시켜서, 법화경의 본불은 상주의 불신(佛身)이 아니라는 설이 유력했다. 그 대표는 광택사(光宅寺)의 법운(法雲 : 467-529)로서, 그는 자신의 법화경주석서(法華經註釋書)인 『법화의기(法華義記)』가운데서, 불신(佛身)의 불변상주성(不變常住性)이라는 관점에서 법화경 본불(本佛)의 수명무량(壽命無量)은 부처님의 신통력(神通力)에 의해서 수명을 연장(延長)한 것(神通延壽)이며, 유한(有限)한 시간(時間)의 연장(延長)은 어디까지 가더라도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법화경』본불의 불신(佛身)은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열반경』의 법신상주설(法身常住說)을 끌어다 비교하여, 『법화경』의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을 해석하고, 이것을 유한(有限)한 불완전(不完全)한 법신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지의(智顗)는 이와 같은 법운(法雲)의 견해에 대해서 엄격(嚴格)한 비판(批判)으 가(加)한다. 그는 우선 세친(世親)의 『법화경론(法華經論)』에 의해서 법화경을 법보응(法報應)의 3신설(三身說)에 의해서 해석하고, 법화경에는 3신설이 설해 있음을 역설(力說)했다. 그리고 지의(智顗)에게 특징적(特徵的)인 것은, 법운(法雲)이 법신상주설(法身常住說)에 입각해서 이해한 구원실성의 본불을, 그는 보신(報身)으로 이해(理解)했다는 것이다. 법신(法身)은 진리를 체(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불변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부처님의 인격적 측면이 사상(捨象)되어 있다. 보신(報身)은 진리와 인격의 양면을 갖춘 보편으로서 구체적인 이상(理想)의 불신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구원실성의 부처님을 진리와 일체(一體)이며, 또한 지혜라는 작용을 가지고 있으며, 응신(應身)으로서 발현(發現)하는 근본(根本)의 부처님인 보신(報身)으로 본 것이다. 더욱더 보신이라고 해도, 그것은 타(他)의 법신(法身), 응신(應身)의 2신(二身)과 떨어진
것은 아니다. 보신은 법신과 일체(一體)이기 때문에 법신을 떠나서 보신은 없다. 또 응신은 보신의 구체적 발현(發現)의 모습이므로 보신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응신이 발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법 ․ 보 ․ 응의 3신은 원만하게 상즉(相卽)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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