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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梵本 법화경 제15장 여래가 가진 수명의 길이―

       
 
1, 부처님(眞理)의 본체(本體)(1) 
          
  이 「제16장, 여래가 가진 수명의 길이(如來壽量品),」즉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의 장(章)」에서는 「훌륭한 의사(良醫)의 비유(譬喩)」 혹은 「의사와 아들(醫子)의 비유」가 설해져 있어서 유명하다.
 「제2장 훌륭(巧妙)한 수단(手段)」이라는 「방편품(方便品)」이 이론적(理論的)이며 공간적(空間的)으로 사물(現
象)의 참모습(實相)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면, 이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는 실천적(宗敎的)이며 시간적(時間的)으로 부처님(眞理)의 본체(法身)를 밝힌 것으로서, 이 두 장(2品)은 둘(2)임과 동시에 하나(1)이니 마치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상즉(相卽)의 관계이다.
 앞의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 석가모니불은 대지(大地)의 하방(下方) 허공계(虛空界)에서 6만 항하사(恒河沙)라고 하는 많은 대보살(大菩薩)들을 불러내었다. 이 많은 보살들은, 그 옛날부터 모두 석가모니불의 교화(敎化)를 받은 사람들뿐이라고 한다. 그때, 이 회좌(會座)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깊은 의문(疑問)을 품었다. 왜냐하면, 가야성(伽倻城)의 근처(近處)에서 부처님이 성도(成道)하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겨우 40여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 정도로 많은 보살들을 교화(敎化)했다는 것은, 어떠한 까닭인가. 게다가 이 보살들은 구원(久遠)의 옛날부터 무량무변(無量無邊)의 부처님들 아래서 보살도(菩薩道)를 완성(完成)하고, 항상 범행(梵行)을 닦아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치 25세의 청년(靑年)이 백세(百歲)의 노인(老人)을 내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지 않는가. 라고 이와 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이 자리를 대표하여, 부처님께 질문한 것이 위대한 사람인 마이트레야보살(彌勒菩薩)이었다. 여기까지가 전장(前章)에서 설해진 것이다. 마침내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이 설해 밝혀지는 것이 본장(本章)「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이다. 첫 머리에 부처님께서는 세 차례(三回)에 걸쳐 『좋은 집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은 여래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던> 진실한 깨달음[誠諦]의 말을 똑똑히 듣고 이해해 굳게 믿도록 하라. (諸善男子 汝等當信解 如來誠諦之語』즉 여래(如來)의 진실(眞實)한 말을 우선 믿어야만 하다, 라고 이와 같이 똑같은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반복(反復)해서 말씀하셨다(三誡). 이에 대해 대중들도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세존이시여 원하고 원하오니 그 진실을 설해 주소서. 저희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다.』하고 간청하고(三請) 다시 한 번 더 청한다(重請).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를 받아 『그대들이여, 분명(諦)하게 들어라.   <극히 깊고 오묘한> 여래의 본체(如來秘密)와 자유자재한 능력(神通之力)을 자세히 들어라(汝等諦聽 如來秘密神通之力)』하시며(重誡), 이제부터 비로소 부처님의 설법이 시작된다. 이렇게 삼계삼청(三誡三請) 중청중계(重請重誡)의 형식을 거친 후에 말씀하신 부처님의 설법 내용은, 지금까지의 석가모니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 버리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앞의 중계(重誡)의 말씀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천(天) ․ 인    (人) 및 아수라(阿修羅)는 모두 지금    의 석가모니불은 석씨(釋氏)의 궁      (宮)을 나와서, 가야성(伽倻城)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량(道場)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    菩提)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선    남자여, 내(我)가 실로 성불(成佛)하    여 지금까지(已來), 무량무변(無量無    邊) 백천만억(百千萬億) 나유타겁(那    由他劫)이나 된다.
라고 사람뿐만 아니라, 천신(天神)과 아수라(阿修羅)도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출가 후에 가야성에 가까운 곳에서 성도(成道)하여 정각(正覺)을 얻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의 붓다(覺者)인 석가모니불은 아득한 구원(久遠)의 옛날에 성도하여 이미 한량없고 끝 가가 없는 (無量無邊) 백 천 만 억(百千萬億) 나유타(那由陀) 겁(劫)이라고 하는, 한없이 길고 긴 시간이 경과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이전까지의 모든 사람들은 물론 천신들이나 아수라나 모두가 다 눈앞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나고, 똑같이 나이 들어갔으며, 이윽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실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成佛)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석가모니불이 지나온 시간(時間)은 5백진점겁(五百塵点劫)이라고 하는 긴 시간을 경과한  백 천 만억 나유타(那由他) 아승기(阿僧祇)라고 설하며, 이 사이에 석가모니불은 항상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계시면서 설법교화(說法敎化)를 계속해 왔다고 한다. 이것이 종래의  부처님의 몸(佛身)에 대한 인식의 일대변혁(一大變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수량품(壽量品)」의 설법(說法)에 의해서 80세 멸도(涅槃)라는 현실의 석가모니불이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가진 불멸(不滅)의 부처님임을 밝힌 것이다. 이 「수량품」의 설법에서 밝혀진 영원한 부처님을「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이라 하며 본불(本佛)이란 적불(迹佛)에 상대한 말이다.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나서 멸(滅)해가는 부처님의 근본적인 뿌리(本源)에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부처님이 계시고, 이 불멸(不滅)하는 부처님의 응현(應現)이 현실의 석가모니불이다. 라고 하는 이런 생각 끝에 생겨난 것이 본불(本佛)이다. 구원(久遠)에서부터 불멸(不滅)의 부처님(佛)은 중생교화(衆生敎化)를 위해 여러 가지로 몸을 나타내어 「만일 어떤 중생(衆生)이 나(我)에게 찾아오면(來至), 나는 부처님의 눈(佛眼)으로 그 사람의 신근(信根)등이 날카로운가, 둔한가(利鈍)를
꿰뚫어 보고(觀), 어떻게 가르치면 깨달음(度)을 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수단을 생각한 후, 그들에 알맞도록(隨) 가지가지(處處)의 다른(不同) 부처님의 이름(名字)을 들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부처님들의 이름이 같지 않으며> 또 그 부처님의 연대(年紀)가 크고 작아(大小) 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應現) 가르침을 설하고 나면 또 다시 이 세상에서 떠나(涅槃)리라는 것도 말(言)한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부처님을 「본불(本佛)」이라 하고, 거기에서 응현(應現)하여 현실(現實)에 모습을 나타내어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을 「적불(迹佛)」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본불(本佛)이라든가, 적불(迹佛)이라고 하여도 부처님에게 본적(本迹)의 두 부처님(二佛)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부처님으로서의 본불(本佛)이 수승(殊勝)한 것이 아니며, 그 응현(應現)으로서의 생멸(生滅)의 모습을 취하는 적불(迹佛)은 보다 한 단계 가치가 낮은 것이라고 하는 우열론(優劣論) 등은 『법화경』의 참뜻에서 전혀 벗어난 것이다. 『법화경』에는 원래「본(本)」이나「적(迹)
」이라는 말은 전혀 설해져 있지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가  「본(本) ․ 적(迹)」이라는 글자의 뜻은「근본(本)」과「흔적(迹)」이라는 의미인데, 원래 『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나오는 「적(迹)」, 즉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서 나타나 있는 것과 「적하는 까닭」, 즉 그것을 생(生)하게 하고 나타나(現)게 하고 있는 근원적(根源的)인 바탕(本)이라는 데에서 유래한다 함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본불(本佛)」이라는 하는 것은 법신(法身)과 보신(報身)을 말한 것이고, 「적불(迹佛)」이라고 하는 것은 화신(化身)또는 응신(應身)을 말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무튼 「본(本) ․ 적(迹)」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후세(後世)에 「수량품」에서 설해진 영원한 부처님과 현실의 부처님을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라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다. 경(經)의 원래의 뜻은 어디까지나 이 현실의 구체적인 석가모니불을 통해서, 혹은 석가모니불 그 자체의 위에 부처님의 영원성(永遠性)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부처님에 대해서 세상에 출현했다던가, 멸도 했다던가, 생멸의 모습 아래에 부처님을 보는 것은, 그것은 우리들이 범부(凡夫)의 눈으로 부처님을 보기 때문이다. 법화경은 이 사실을 「육구지견(六句知見)」이라고 하는 제일(第一). 제이구(第二句)에서 「여래는 여실(如實)히 삼계(三界)의 모습(相)을 지견(知見)한다. 생사(生死) 혹(若)은 퇴(退). 혹은 출(出)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亦)한 재세(在世) 및 멸도(滅度)하는 사람(者) 없다.」라고 한다. 여래의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눈으로 본다면, 생사(生死)라든가. 재세(在世) ․ 멸도(滅度)라고 하는 생멸(生滅)의 모습은 없고, 본래(本來) 상주(常住)하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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