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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妙法蓮華經 法師品 第十


梵本 법화경 제10장 가르침을 설하는 사람
  3. 자비와 지혜  
  이 「법사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라 할 수 있는 법사가 지녀야 할 세 가지의 근본적인 마음가짐 가운데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법을 설해야만 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 본 바와 같다. 그런데 이 말은 「일체 중생에 대한 큰 자비심」을 뜻하는 것으로서 즉 부처님의 방(자비심)은 광대무변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그 속에 넣는 것이다. 우리들이 남에게 법을 설할 때, 그와 같은 넓고 큰 자비심을 가지고 설해야만 한다. 상대방이 선인이든 악인이든 가르침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든 고분고분 잘 따르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똑같이 감싸 안아 주는 넓고 큰 자비심을 근저에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자비란 어떤 것일까.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틀림없이 이 두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 기회에 자비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를 철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자비란 일반적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 또는 사랑하는 애정 혹은 동정심 등의 감정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직 반쪽만의 이해밖에 되지 않는다. 사전에 보면 「①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일. ② 부처 또는 보살이 중생에게 낙(樂)을 주고 고(苦)를 없이하여 주는 일」(이희승 편저 민중서관)로 되어 있으며 다른 사전에도 대동소이하다.
자비(慈悲)란, 함께 즐거워하려는 마음이다. 즉 자비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든가, 「애타심(愛他心)」이라든가, 하는 말이 갖는 뜻보다도 더욱 깊은 불교 특유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자(慈)」란, 범어 마이트레야(Maitreya)의 번역으로서 마이트레야란, 미투라(벗; 友)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인데 그대로는 「최고의 우정」이라는 의미이지만 그것에 포함된 깊은 뜻은 「특정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 대해 우정을 갖는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중국인은 이것을 보편적인 인애(仁愛)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이 자(慈)의 마음은 평등심에서 나온다고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 자기가 즐겁다고 느끼면 다른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맛보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좋은 가르침을 듣고 기쁨을 느끼면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란 한 마디로 말하면 「여락(與樂) 즉 즐거움을 주는 마음」이라고 정의(定義)하고 있다.
「비(悲)」란 범어 카루냐(Karunya)의 번역으로서 카루냐란, 원래 <신음(呻吟)>이라는 의미인데 인생살이의 갖가지 괴로움에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그 신음 소리를 듣고 자기도 동감하고 동정하여 “음”하고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 「비(悲)」이다.
자기 자신도 일찍이 인생고에 신음하고 탄식한 일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남의 괴로움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일찍이 참으로 괴로워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남의 괴로움에 뼈저리게 동감할 수 없다. 이리하여 남의 괴로움을 내 괴로움처럼 느껴 마음속에서부터 이해하고 걱정해 주는 것이 카루냐이다. 중국인은 이것을 <비>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참으로 명역(名譯)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남보다도 좀더 앞서 인생고에서 해탈하고 있는 사람은 현재 인생고에 괴로워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자연적인 정으로서 어쨌든 그 괴로움에서 건져 주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없다. 이것도 또한 평등심의 발로이다. 그리하여 「비(悲)」란, 「발고(拔苦) 즉 괴로움을 뽑아 주는 마음」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자비란 어떤 상항에서 혹은 어떤 시점에서 남보다 즐거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그 즐거움을 남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또 어떤 상항에서 혹은 어떤 시점에서 이미 괴로움에서 벗어난 사람이 남의 괴로움을 자기의 괴로움으로 느끼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함께 맛보려는 마음을 말한다.
결국 그것은 평등심의 발로(發露)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가 평등한 것인데 어떤 처지에서 어떤 시점에서 낙(樂)과 고(苦)의 불평등이 생겨난다. 그 불평등이 자연히 마음 속 깊이 메아리쳐서 그 불평 등을 평등으로 되돌리려는 마음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솟아난다.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되는 마음 이것이 자비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심이란 인간이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성질이지만 그것이 항상 크게 발동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인간평등」이라는 진리에 투철한가, 아닌가에 의해 좌우된다. 불교에서는 우선 「인간평등」이라는 큰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 『법화경』에서도 그 전반(前半)의 적문(迹門)에서 「실상(實相)」이라는 큰 지혜를 가르친 것이다. 즉 십여시(十如是)가 그것인데, 여시상(如是相) ㆍ여시성(如是性)ㆍ여시체(如是體)ㆍ여시력(如是力) ㆍ여시작(如是作)ㆍ여시인(如是因)ㆍ여시연(如是緣) ㆍ여시과(如是果)ㆍ여시보(如是報)ㆍ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境等)이란, 어떠한 모습이든, 어떠한 성질이든, 어떠한 바탕이든, 어떠한 능력이든, 어떠한 작용이든, 어떠한 원인이든, 어떠한 조건이든, 어떠한 결과이든, 어떠한 영향이든, 처음에서 끝까지 파헤쳐보면 모두가 평등한 것이라는 평등성지(平等性智), 다시 말해 반야의 공을 말하고 있음이니, 그 점을 깊이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지혜, 즉 일여(一如)의 경지(境地)에 바탕을 둔 자비가 아니면 때때로 정(情)에 치우친, 번뇌(煩惱)에 사로잡힌, 잘못된 「동정심(同情心)」으로 끝나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아이가 넘어진 것을 무조건 「아! 가엾어라」하고 일으켜 주는 것은 언뜻 보아서는 자비처럼 보이지만 참다운 자비는 아니다. 그 아이가 스스로의 생명력을 자각케 하기 위해 마음을 모질게 갖고 일으켜 주지 않는 편이 좋은 경우가 많다.
「착하지, 너 혼자 일어설 수 있지요」 하고 격려하거나 암시를 주는 것, 이것이 참다운 자비인 것이다. 친구에게나 부하 직원에게나 그 밖의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어느 때는 위로하고 어느 때는 안아 주지 않으면 안 되지만 어느 때는 꾸짖고 어느 때는 모른 체 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다. 상대방의 성격, 상태, 환경, 그 밖의 다른 조건에 따라서 그때그때 그 경우에 꼭 들어맞는 행동을 취해서 그 사람의 생명력을 진정으로 발현시키고 신장시켜 주는 그것이 <지혜>에 바탕을 둔 <자비>인 것이다.
『방편품』에서 5천인의 제자들이 자리를 뜬것에 대해 석존께서는 이를 저지하지 않고 모르는 체 한 것도 커다란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자비란 평등성의 원리 위에서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에 눈을 떠야만 비로소 참 자비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다』는 동체(同體) 사상을 온 몸으로, 즉 안(眼)·이(耳) ·비(鼻)ㆍ설(舌)·신(身)·의(意)전체에서 체득하여 부처님의 지혜[般若]를 완
성[波羅蜜多]하고 남 즉 나, 나 즉 남이라는 일체감(一體感) 속에서 남과 남이라는 상대적인 생각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자기가 자기 아닌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 자비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여기에 털끝만큼이라도 너와 나의 구별이 있거나 베푼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나[我]라는 생각(我相), 살아 있는 사람[人]이라는 생각(人相), 개체(個體)라는 생각(衆生相), 개인(個人)이라는 생각(壽者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는 자비가 아니라 우월감이거나 단순한 동정에 불과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말세에서 남에게 법을 설하는 사람은 우선 이 평등성의 지혜에 바탕을 둔 큰 자비심을 가지고 설하라고 하신 그 참뜻을 깊이 새기면서 이 「법사품」을 이해(理解)해야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반야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비를 운운한다는 것은 법화행자가 취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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