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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수하무학인기품제9(授學無學人記品 第九)

아난다와 라훌라 두 사람 및 2천인의 비구에 대한 예언
 아난다(阿難)의 과거와 라훌라의 밀행(密行).  (2)
그와 같은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아난다와 라훌라의 사적(事跡)을 대충 살펴보기로 하자.
아난다는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 왕의 동생 아므리타(Amrtadana; 甘露飯) 왕의 아들로 석존의 4촌 동생[從弟]에 해당하며 제바달다(提婆達多)의 동생이기도 하다.
석존께서 성도한 후에 처음으로 카필라바스투(迦毘羅衛城)에 돌아갔을 때, 아난다는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사리불이나 마우드가리야야나의 추천으로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따르는 시자(侍者)가 된 사람이다. 그 때까지 곁에서 모신 사람은 몇 사람 있었으나 모두 다 실증이 나서 오래 모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난다는 20 년 동안 한 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섬겼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매우 훌륭한 기억력을 가져 석존의 설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전(佛典)에는 『불고아난(佛告阿難), 즉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 하시기를』라고 하는 말이 수없이 나오는데 그만큼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가졌으며 또 그만큼 붓다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리불(舍利弗)·마하카샤파[摩訶迦葉] ·마우드가리야야나 그 밖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린 일이며 설법회에서 많은 청중에게 설하신 가르침도 아난다가 그 장소에 있었던 한,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단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렸으며 부처님께서 멸도 하신 후 제1회 결집 때, 법 즉 경전의 송출자(誦出者)로서 선출되었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아난다는 매우 선량하고 온순하여 마음이 약한 곳이 있었다. 그렇지만 석존에 대한 충직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니 제바달다가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석존을 해치려고 했을 때에도 다른 비구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아난다 혼자만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난다는 또 마음이 곱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석존께서 동원녹자모 강당(東園鹿子母講堂)에 계실 때에 목욕을 하시고 난 후 등을 말리고 있자 아난다는 그 등을 만지며 석존의 육체가 쇠퇴한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을 말씀드렸다고 전한다.
 또 쿠시나가라에서 석존께서 점점 위독상태에 빠져 계실 때, 아난다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와 문고리를 붙잡고 울었으므로 아니룻다(阿那律)가 “비구라는 사람이 평정을 잃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하고 질책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과연 비구로서는 걸맞지 않은 태도였을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보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친근함이 느껴지는 인품이었다.    
이렇게 고운 성질을 가진 위에 또 매우 미남자였기 때문에 여성 사이에 매우 인기가 있었으니 혹은 짝사랑에 시달리기도 하고 거리의 부랑자들에게 놀림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마탕가(摩登伽)라는 찬드라, 즉 불가촉민인 천민의 딸에게 열렬히 사랑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아무튼 엄격하고 준엄한 비구 교단 가운데 아난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재가의 신도들은 물론 비구니 교단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구원이었다. 아니 비구니 교단 그 자체가 원래 아난다 덕분에 생긴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석존께서 성도(成道)하신지 5년 후, 부왕이신 슛도다나(淨飯)왕은 천수(天壽)를 다하여 돌아가시게 되었다. 석존께서는 그 장례를 위해 카필라바스투[迦毘羅衛城]에 가셨으며 거기서 비샤리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석존의 생모 마야 부인의 동생으로 정반왕의 후처가 되어 석존을 양육한 고타미(Gautami; 曇彌; 摩訶波波提)는 앞서 친아들인 난다(Nanda; 難陀)도 의손자(義孫子)인 라훌라도 출가하고 지금은 또 남편인 대왕도 앞서 떠나보내고 나니 점점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석존께 출가를 말씀드렸었다. 그러나 석존께서는 고타미가 몇 번이고 간청했지만 허락지 않았다.
그 때 석존께서는 바이샤리(Vaisali; 毘舍離)국을 향해 출발했다. 궁전에 남게 된 고타미는 아무래도 출가의 뜻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 뒤를 따라갈 것을 결심했다. 그러자 남편들의 출가에 의해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많은 귀족 부인들도 고타미와 동행하겠다고 말했다.
부인들은 일제히 검은머리를 풀어 내리고 허술한 옷을 걸친 후 손에는 한 개의 나무 발우를 들고 맨발로 카필라 바스투를 떠났다. 지금까지 훌륭한 궁전의 깊은 곳에 살며 어떤 부자유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귀부인들에게는 이러한 여행은 매우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리하여 겨우 석존이 계시는 정사(精舍)의 문밖에 당도했을 때는 모두 피로에 지쳐서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듣고 시자인 아난다가 나와 보았더니 고타미를 비롯하여 많은 부인들이 완전히 변한 모습으로 있지 않은가. 깜짝 놀란 아난다가 그 사유를 묻자 불도에 들어갈 결심으로 먼 길을 마다 않고 여기 까지 왔노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즉시 석존의 곁으로 되돌아간 아난다는 이 사실을 말씀 드리자 석존께서는 “아난다여, 여인이 엄한 계율 아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포기하도록 설득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난다는 언뜻 승복하지 않았다.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세존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만 문을 열고 여자에게는 닫는다는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진리라는 것은 천상계의 것들이나 인간계의 것들에게나 진리이거늘 하물며 남녀의 차별 따위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교단에 여자가 들어온다는 것은 그 자체가 별문제인 것이다. 기필코 교단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므로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미완성의 남녀 출가 수행자가 함께 생활해 가면 자연히 여러 가지의 문제가 일어나서 도(道)를 잃어버리는 사람도 생길 가능성도 많이 있을 터이니 그 점을 석존께서는 걱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인정이 많은 아난다로서는 문밖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부인들을 지금 다시 쫓아 버릴 수는 도저히 없었다. 일생 동안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던 아난다도 이 때만은 자기의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의 문이 남녀의 어느 쪽에도 열려 있다고 하면 여인의 출가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세존을 오랫동안 길러 주신 고타미가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존이시여, 고타미를 비롯한 일동의 진심을 가엾이 여기시고 아무쪼록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아난다의 말에는 무리가 없다. 원래부터 석존께서도 인정이 많은 분이었으므로 드디어 아무말없이 허락하게 되었다. 아난다가 이 사실을 부인들에게 전하자 일동은 감격하여 크게 울었다 한다.
석존께서는 새롭게 여자의 출가 수행자를 위해 계율을 정하시고 엄히 그것을 말씀하신 후 제자 가운데 동참시켰으니 비로소 비구니 교단이 성립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석존께서 입멸하신 후 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해 행한 제1회의 결집, 즉 왕사성 결집 때에 아난다는 많은 비구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마하카샤파가 대표가 되어 다섯 가지의 죄를 들어 비난했는데 그 중에 「여인의 출가를 억지로 세존께 간청한 것」 「세존의 유체(遺體)를 맨 먼저 여인에게 예배시킨 것」등 여인에 관한 조항이 두 개나 있는 것은 자못 아난다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온화한 인품과 훌륭한 교학의 지식과 설법의 교묘함은 비구니 교단이나 재가 신도뿐만 아니라 차츰 비구 교단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하카샤파가 입적(入寂)할 때에는 교단의 일을 아난다에게 위임하고 죽었다고 하니 어느덧 교단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난다는 120세의 장수를 유지하였고 화정 삼매(火定三昧)에 들어 시적(示寂)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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