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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효무제 때 제나라 사람에 동방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독서는 다방면에 이르렀고, 깊이 또한 견줄만한 데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벼슬은 ‘낭’에 지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비웃어 말하자, 그는 노래를 불렀다.
세속에 묻혀 살며 / 세상을 금마문(金馬門)에서 피한다. / 궁중 안은 세상을 피하고 /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데 / 하필 깊은 산골의 / 쑥대 움막 속에서랴.
(동방선생. “사기열전”에서 떠옴)
남들은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동방선생은 끝내 ‘낭’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큰 벼슬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은, 삶의 그림자가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삶의 모습을 통해 죽음을 본다. 죽음은 우리 몸에 붙은 그림자처럼 단 한 번도 우리를 벗어나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경계하며 죽음을 잘 살기 위해 노력 할뿐이다. 경계하고 자제하는 삶 속에서 죽음은 그림자에 머물고, 방탕하고 막무가내의 삶에는 죽음이 삶의 자리를 넘본다. 본디 생애(生涯)라는 말에 삶은 난간이라는 뜻이 있지 않는가. 조선조의 빼어난 수필 중 하나인 ‘주옹설’을 보자.
손(客)이 주옹(舟翁)에게 묻기를, "그대가 배에서 사는데, 고기를 잡는다 하자니 낚시가 없고, 장사를 한다 하자니 돈이 없고, 진리(津吏) 노릇을 한다 하자니 물 가운데 만 있어 왕래가 없구려. 변화 불측한 물에 조각배 하나를 띄워 가없는 만경(萬頃)을 헤매다가, 바람 미치고 물결 놀라 돛대는 기울고 노까지 부러지면, 정신과 혼백이 흩어지고 두려움에 싸여 명(命)이 지척(咫尺)에 있게 될 것이로다. 이는 지극히 험한 데서 위태로움을 무릅쓰는 일이거늘, 그대는 도리어 이를 즐겨 오래오래 물에 떠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재미인가?"하니, 주옹이 말하기를, "아아, 손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대개 사람의 마음이란 다잡기와 느슨해짐이 무상하니, 평탄한 땅을 디디면 태연하여 느긋해지고, 험한 지경에 처하면 두려워 서두르는 법이다. 두려워 서두르면 조심하여 든든하게 살지만, 태연하여 느긋하면 반드시 흐트러져 위태로이 죽나니, 내 차라리 위험을 딛고서 항상 조심할지언정, 편안한 데 살아 스스로 쓸모 없게 되지 않으려 한다.
하물며 내 배는 정해진 꼴이 없이 떠도는 것이니, 혹시 무게가 한 쪽에 치우치면 그 모습이 반드시 기울어지게 된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시리 내가 배 한가운데서 평형을 잡아야만 기울어지지도 뒤집히지도 않아 내 배의 평온을 지키게 되나니, 비록 풍랑이 거세게 인다 한들 편안한 내 마음을 어찌 흔들 수 있겠는가? 또, ' 무릇 인간 세상이란 한 거대한 물결이요, 인심이란 한바탕 큰바람이니, 하잘것없는 내 한 몸이 아득한 그 가운데 떴다 잠겼다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한 잎 조각배로 만 리의 부슬비 속에 떠있는 것이 낫지 않은가? 내가 배에서 사는 것으로 사람 한 세상 사는 것을 보건대, 안전할 때는 후환을 생각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느라 나중을 돌보지 못하다가, 마침내는 빠지고 뒤집혀 죽는 자가 많다. 손은 어찌 이로써 두려움을 삼지 않고 도리어 나를 위태하다 하는가?"
(권근 - ‘주옹설’ 전문)
삶이라는 난간은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위태로운 것이다. 불교적 사고관에서 삶은 죽음과 이어져 있다. 윤회의 관점에서 삶과 죽음의 관계를 보면, 우리가 살면서 행하게 되는 모든 것은 업으로 쌓이고, 그 업에 의해 죽음 이후의 세계가 결정된다. 하지만 수학의 공식처럼 인과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순업을 쌓으면, 좋은 종자가 되지만, 그 종자가 어디에 떨어질 것인가는, 다른 인연과 관련이 있다. 즉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인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인연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우연 같지만, 우연과는 또 다르다. 이승에서 맺어지는 인연은 단지 이승의 삶에만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생은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수많은 전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업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한 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전생을 함께 산다. 어쩌면 짐승으로 살았던 전생이 있을 수도 있고, 수도승으로 산 전생이 있을 수도 있다. 모든 축생이 나의 전생일 수도 있고,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날 자가 개의 얼굴이나 닭의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살생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전생이 사람이었을 수 있고, 다음 생이 사람일 수 있으므로, 짐승을 죽이는 것은 곧 사람을 죽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의 전생이 무슨 탈을 쓰고 살았는지 모르므로 살생을 한다는 것은 곧 동종을 죽이는 것이 된다. 지금은 사람의 형상으로 살고 있지만, 다음 생에서 우리는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니 나 아닌 것이라고 여겼던 대상이 언제까지 타자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연설에 근거하면, 세상의 모든 개체는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하는 것도 인연이지만, 밥 한 끼 먹는 것도 인연이다. 물 한 모금과 우리의 호흡을 이루어 살게 하는 공기도 한 개체를 독립된 어떤 것으로 놓아두지 않는다. 너무 흔하여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공기를 예로 든다면, 우리는 풀과 나무와 동물과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 어떤 개체가 공기에 나쁜 성분을 섞는다면, 우리는 숨 쉬는 것부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별 의심 없이 공기를 마시지만, 거기에는 다른 개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다. 우리가 잠 든 사이에 누군가가 독가스를 뿌렸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들이 편하게 숨 쉬는 데 도움을 준 동식물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난간을 걷는 생.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생이 단순하게 이승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원을 사는 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삿된 것을 경계하며, 나와 만난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절하며 사는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어찌 보면 죽음을 완성함으로써 삶이 의미를 찾는 것. 완전한 삶도 완전한 죽음도 없는 것이니.
얼마나 밥을 먹어야 / 앞으로 얼마나 밥을 먹어야 / 죽을까 / 어떤 저녁은 / 어떤 점심은 /너무나 맛없어 뱉아내듯 흘리며 먹는다 / 식탐에 겨워 맛난 것들 끌어당기며 / 숨차게 먹을 때도 있지만 / 많은 날을 / 젓가락과 숟가락이 못난 뜨개질하듯 / 줄창 코를 빠뜨리고 / 코를 빠뜨리고 이지러진 생활을 짜듯 / 저녁 또는 점심 / 소도구로 앞에 밥공기가 하나 놓인 / 일인 무언극처럼 우스꽝스러운 행위 / 이 밥 먹는 일 언제나 끝날까 / 이 세상의 밥들이란 밥들처럼 / 임자가 확실한 게 또 있는지 / 이 세상의 죽음이란 죽음처럼 / 아무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 임자가 확실한 게 또 있는지 / 밥을 떠먹는 손이여 / 결국 죽음의 뜨게질이여
(이진명 - ‘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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