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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향

 

 

 

대개의 종교가 절대자를 믿고 따르는 데 반해, 불교는 그렇지 않다. 불교는 신을 믿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는 자기 안의 신을 찾는다. 즉 절대 권력을 가진 어떤 존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의지하며, 자기를 밝힘으로써 영원불변한 진리, 연기를 깨닫는다. 그러므로 불교는 먼저 깨달은 자가 누구이든지간에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깨달은 자들은 한 모범으로 존재하고, 내가 그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이다.
석가세존께서 현세에 나투셨을 때, 인도에는 바라문교와 기복 신앙이 성행하고 있었다. 석가는 바라문들에게 물었다. 최초의 절대자를 본 자가 누구인가? 바라문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석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의 스승은 너희에게 절대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너희의 스승은 절대자를 보았는가? 아니다. 너희의 스승은 그의 스승이 전하는 말을 다시 전했을 뿐이다. 봉사들이 봉사 뒤를 따르며, 앞 선 봉사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을 그대로 믿듯이, 너희는 보지도 못했으면서 그 말을 봉사처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석가께서는 기복신앙에 대해서도 따끔한 지적을 아끼지 않는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면서, 자기 외의 다른 힘에 의지해서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자기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서 어떤 다른 힘이 자기의 일을 이루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세상의 일은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야 한다. 물론 자기만으로는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그것은 인연에 달린 것이다. 이것이 근본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의 출발은 논쟁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석가께서는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목숨을 건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철학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런 논쟁을 통해 석가께서는 업과 윤회,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이치를 밝혀 놓았다. 그 이치가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기 때문에 불교를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불교는 종교이다. 종교와 철학의 가장 큰 차이는 내세관의 유무에 있다. 불교는 분명하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삶과 죽음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고 성장하고 여물고 죽는다. 그것이 순리다. 때론 여물지 못한 죽음도 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나고 죽는다는 말로 수정해야겠다. 태어나면 죽는다. 그것이 우주의 원리이다. 어떤 목숨이건 끝이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그것은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집착도 번뇌도 버리고 자연스럽게 흘러가자는 것이다. 그래야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을 수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본디 없었던 것이 없었던 세계로 돌아감이다. 그러므로 ‘돌아간다’는 말은 얼마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가.
지나온 햇수 육십칠 년 열과행년육십칠 (閱過行年六十七)
이르러 오늘 아침에 만사가 끝났도다 급도금조만사필 (及到今朝萬事畢)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평탄하고 자연스러우니 고향귀로탄연평 (故鄕歸路坦然平)
앞길엔 분명 다시 실수는 없겠네 귀두분명증미실 (歸頭分明曾未失)
손에는 겨우 지팡이 하나뿐 수중재유일지공 (手中?有一枝?)
또 즐겁고 가는 길에 다리 덜 피곤하겠네 차희도중각불권 (且喜途中脚不倦)
원감국사 충지(?止)의 시이다. 임종게이지만 편안하게 읽힌다. 선적인 어떤 깨달?을 구태여 담지 않으려 한 데서 일생을 민중과 함께 하려한 국사의 자세가 올곧게 드러난다. 이미 왔던 곳으로 가기에 지닌 것은 늙은 몸을 의지할 지팡이 하나뿐이다. 미혹도 없고 미련도 없다. 그 길이 인과의 길이요, 윤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무겁거나 고통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굳이 선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 ‘귀천(歸天)’ 전문)
평생을 가난과 술로 살았던, 시인 천상병은 한 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한 때는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청량리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기도 하였다. 그의 삶을 돌이켜 보건대 결코 만족할만한 어떤 것도 없으며, 그저 한스럽기만 하거늘 시인은 그런 속세 인간의 번뇌 따위는 훌쩍 건너뛰고, ‘하늘도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60 평생의 한 많은 생을 ‘소풍’이라는 말로 정리해 버렸다. 지극한 숭고미다. 어린 시절 봄소풍이나 가을 소풍처럼 잠깐 다녀온 소풍은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었던가. 그러나 막상 소풍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다시 소풍을 기다리는 마음속에서 소풍은 기쁨이었다. 그처럼 그가 다녀간 이승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그나마 즐거웠고, 또 어떤 기대감 속에서 즐거울 수 있는 소풍이었을까. 그렇다. 이것은 불교적 내세관, 혹은 세계관이 아니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 시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이승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기나긴 우주적 삶에 비했을 때 소풍처럼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별 하나가 태어나고 사라짐도 찰라일 것인데, 어찌 인간의 생이 찰라가 아니겠는가.
그런 우주적 시간관으로 본다면 삶과 죽음의 몸바꿈은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는가. 그런 사유체계가 우리들 의식의 바탕에 깔려 있기에 다음과 같은 설화적 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 ‘남해금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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