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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본가 대흥사 차 문화의 시작과 끝

 

 

해남 대흥사를 품고 있는 두륜산은 해발 760여m다. 높지 않은 산세에도 불구하고 깊은 숲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많은 곳이어서 계절마다 새롭게 아름답지만 가을이 되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단풍나무 숲 아래로는 동백나무 고목들이 군락이루며 산으로 올라갈수록 많아져 이름처럼 겨울 끝 무렵이면 붉은 꽃 피웠다가 가장 아름다울 때 마치 꽃을 던지듯이 툭툭 지우고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시오리 숲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문득 문득 세월을 건너 숲길 어디쯤 옛 이들을 마주칠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나무마다, 길 위에 흩어진 돌마다 숲을 쓰는 바람마저도 예사스럽지 않은 곳이다.
그렇게 걸어 오르다 보면 절집 거개가 그렇듯이 그곳에 머물다간 스님들의 자취를 남겨놓은 곳인 부도전을 만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이고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수승한 수행자들의 발길이 머물고 있었는지 절집안의 세월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상이라는 시간의 바다위로 잠시 코를 내밀고 숨을 쉬는 순간에 있는 것 같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늘 그렇게 스쳐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 걷는 길 위로 한꺼번에 다가섰다 멀어진다.
여하튼 대둔산은 숲이 깊고 흙이 많은 육산이어서 물이 좋은 샘을 많이 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대흥사 산내 암자 곳곳의 샘물이 좋다.

서산대사 영정모신 표충사의 장군수
일주문을 지나 절집 안마당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무염지라는, 작지만 예사스럽지 않은 연못이 하나 있다.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표충사는 이 연못을 끼고 오른 쪽으로 돌아서면 보인다. 그 앞쪽으로 세월에 묵어 보이는 샘이 하나 있다. 전해내려 오는 이름이 장군수다. 우리나라 장군수라고 하는 샘이 여러 곳에 있는데 그런 샘들 중에 절집에 있는 샘들은 대부분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인연이 있는 곳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스님들로 이루어진 승병들을 이끌어 나라를 구한 승병장이다. 이곳 대흥사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유언으로 사명대사의 의발을 봉안해 호국도량이고 그 문 옆에 장군수가 있으니 우연의 일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매우 의미가 있는 샘이다. 샘의 규모로 보아서는 예전에는 물의 수량이 많았었을 것 같고 지금도 물이 흘러넘치고 있으나 주변에 공사를 하면서 길이 돋아져서 마실 수 없는 샘이 되어 늘 안타까운 마음이었으나 대흥사 새 주지 범각 스님이 이 샘을 다시 복원하여 다시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표충사와 초의선사 동상 사이 길로 가다가 계곡에 들어서게 되면 그 계곡을 따라 약 1㎞ 가량 올라간 곳에 있는 두륜산 산중턱에 자리한 대흥사의 산내 암자인 진불암이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 수 백년동안 하늘을 받치고 서 있었던 듯 은행나무는 이곳이 얼마나 고졸한 도량인지 말해주고 있다. 부처님을 모셔놓은 작은 법당과 양옆에 있는 요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가을에 깎아 주렁주렁 매달아 말리고 있는 곶감이 익어가고 있는 모습에 계절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채비하는 스님의 마음이 한가롭게 느껴진다.
진불암의 기록은 정확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기록이야 어쩌겠는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있어 내려왔던 세월이 어디로 사라져버려 없었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스님들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본디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암자 이름이 말해주듯 진불암(眞佛庵)은 언제였든가 저 동백나무숲 사이 길로 들어서며 세상과 눈 맞춤이 겨워 미소 지으며 뒤편 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 있었을지, 아니면 언제인지 그 때 이곳에서 연꽃 한 송이 피어나길 원하므로 그리하였는지.
요사 한 쪽에 그저 막돌을 날라다가 키보다 높이 쌓아올린 소박한 돌탑위로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왼편에 있는 요사 끝에 진불암 샘이 있다. 비바람을 막이로 문까지 해 달아 놓은 샘이다. 물맛은 맑고 입안에서 스며드는 것처럼 부드럽다. 우리나라의 18~19세기는 여러 가지로 혼란의 격동기였다. 차 마시는 풍습 또한 자연 쇠퇴하였으나 스님들 수행생활에서의 차는 필요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절집에서나마 차 문화는 면면히 살아 이어져 올 수 있었다. 그렇게 사라져가던 차 문화의 불씨가 숨어있던 곳이 바로 대흥사이다.
초의스님을 중심으로 다산, 추사등 한 시대를 이끌어가던 문인들이 이루어 낸 차 문화가 없었다면 사라져 가던 우리의 차 문화를 오늘과 같이 이루어 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초의·추사의 운명적인 만남

다산 정약용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임금인 정조의 눈에 띄어 인정받게 되고 28세인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탄탄대로를 걷다가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일찍이 외국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다산은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 뒤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강진으로 유배와 처음에는 동문 밖 주막집 사의재(四宜齋)에 있었는데 거주한지 5년째 되는 을축(乙丑 1805)년 가을에 인근 백련사(만덕사)에 소풍을 나갔다가 백련사에 주석하는 혜장 선사(惠藏禪師 兒菴 1772~1811)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다산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와의 교류로 인해 유배를 당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 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매우 삭막한 처지였고 혜장스님 또한 억불정책으로 인해 소외된 계층으로서의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처지였으니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만남이었다.
그 시대의 차 문화는 많이 쇄락했으나 사상가요 문장가인 다산도 한양에 있을 때 여러 문인들과 차를 마셨다. 더욱이 혜장스님을 만나면서부터 차가 주는 매력에 더 깊이 빠지게 된다. 그 해 혜장 선사의 주선으로 고성사로 옮겨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 이름하고 거처를 옮기게 된다.

다산초당 약천
다시 삼년 뒤 1808년 윤단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마을에 살던 해남 윤씨 집안의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이 지은 산정(山亭)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조선시대 3재의 한명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다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귤동마을의 해남 윤씨는 바로 그들의 후손이니 다산에게는 외가로 먼 친척뻘이 된다. 그런 인연으로 윤단은 다산을 만덕산 기슭의 초당에 모셔다 자신의 아들 윤문거(尹文擧)를 비롯한 삼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 소문이 퍼져 나중에는 18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다산초당으로 몰려들어 배움을 청하게 된다.
다산은 다산초당 옆에는 연못을 만들고, 나무 홈을 파서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그 못으로 폭포수가 떨어지게 하고 만덕산 앞으로 흐르는 탐진강에서 돌을 주워서 연못 가운데 산처럼 쌓았으며, 못 주변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산의 이름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고 붙였다고 전해진다.
강진군 귤동마을 다산 기념관 뒤로 올라가는 산길을 따라 십여 분 정도 오르면 초당 앞에 올라서게 된다. 다산이 18년 유배기간을 보내며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심서>등 500여 편이 넘는 책을 쓴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다산초당 왼쪽으로 돌아가면 산 쪽으로 작은 샘이 있다. 돌로 올려쌓은 작고 소박한 샘이다. 바닥은 모래처럼 부서진 운모석으로 정갈하고 푸른 이끼가 보인다. 사람들은 이 샘을 보고 약천이라고 한다. 이 물로 다산과 그의 문하생들이 차를 마시고 혜장스님과 초의스님과 차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서로가 가지고 있는 학문을 이야기하며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샘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니 가슴이 시원해진다. 이백여 년 전 그들은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서로 마음을 열고 이 물로 차를 마셨으리라. 삶이라는 여정에 있어서 좋은 벗 하나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데 다산과 혜장스님은 불행한 여건 속에서 위로 받고 격려해줄 수 있는 좋은 벗을 만나 날이 새는지조차 잊은 채 차를 마셨으리라.
이들의 만남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만남과는 다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옛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 개념하고는 다르다. 천리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중계방송을 할 정도로 지금의 거리 개념과 시간의 개념은 과거와는 너무 다르다. 더구나 다산, 혜장, 초의 스님이 살던 시대는 편지를 한 차례 보내려 하여도, 한 번 만나려 하여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느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였다. 요즘 우리가 갖는 만남이라는 것과 행위는 같을지 몰라도 만남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다르다.
다산초당이나 백련사에서 일지암까지 간다고 하면 지금도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 그 즈음 교통수단으로는 말을 탄다거나 걸어서 가야할 처지였으니 문득 가서 만나는 한 나절 거리의 만남이 아니다. 적어도 종일 걸어서 가야했고 한 번 만나려면 이틀 이상의 시간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해야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산초당에서 언덕을 넘어 백련사로 이어진 산길이 있다. 이 길이 다산과 혜장 스님이 만나러 넘어 다니던 길이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다 보니 많이 도회화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옆으로는 묵은 동백나무 숲 아래 야생차나무들이 있고 걷노라면 풀들이 발길에 가로 걸리는 좁은 산길이었다. 지금은 이 산을 만덕산이라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차나무가 많아 다산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정약용이 호를 다산이라고 한 것도 이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헤우전통덖음차 제다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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